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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시화집

레프 톨스토이,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쉬킨,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콥스키,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 저 외 21명 정보 더 보기/감추기 | Muse(뮤즈) | 2021년 05월 20일 리뷰 총점9.5 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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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1년 05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68쪽 | 346g | 128*182*14mm
ISBN13 9791197296987
ISBN10 1197296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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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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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26명)

저 : 레프 톨스토이 (Lev Nikolayevich Tolstoy,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사상가.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손꼽힌다. 1828년 9월 9일, 러시아 남부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2살과 9살 때 각각 모친과 부친을 여의고, 이후 고모를 후견인으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16세가 되던 1844년에 까잔 대학교 동양어대학 아랍·터키어과에 입학하였으나 사교계를 ...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사상가.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손꼽힌다. 1828년 9월 9일, 러시아 남부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2살과 9살 때 각각 모친과 부친을 여의고, 이후 고모를 후견인으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16세가 되던 1844년에 까잔 대학교 동양어대학 아랍·터키어과에 입학하였으나 사교계를 출입하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곧 자퇴해 1847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보적인 지주로서 새로운 농업 경영과 농노 계몽을 위해 일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이후 3년간 방탕하게 생활했다. 1851년 맏형이 있는 카프카스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1852년 문학지 [동시대인]에 처녀작인 자전소설 중편 「유년 시절」를 발표하여 투르게네프로부터 문학성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1853년에는 『소년시절』을, 1856년에는 『청년시절』을 썼다. 1853년 크림전쟁이 발발하여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전쟁 경험은 훗날 그의 비폭력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크림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56)를 써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이듬해 잡지 『소브레멘니크』에 익명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작품 집필과 함께 농업 경영에 힘을 쏟는 한편, 농민의 열악한 교육 상태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학교를 세우고 1861년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간행했다. 1862년 결혼한 후 문학에 전념해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을 집필,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렸다. 1859년에 고향인 야스나야 뽈랴나에 농민 학교를 세우는 등 농촌 계몽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으며 농민학교를 세웠다.

34세가 되던 1862년에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하여 슬하에 모두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볼가 스텝 지역에 있는 영지를 경영하며 농민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1869년 5년에 걸쳐 집필한 대표작 『전쟁과 평화』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1873년에는 『안나 카레니나』의 집필을 시작해 1877년에 완성했으며, 1880년대는 톨스토이가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던 시기로 알려져 있는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크로이체르 소나타』『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등의 작품이 쓰인 시기도 바로 이때이다.

그러나 이 무렵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그리하여 1880년 이후 원시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면서 사유재산 제도와 러시아 정교에 비판을 가하고 『교의신학 비판』, 『고백』 등을 통해 ‘톨스토이즘’이라 불리는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사십대 후반 정신적 위기를 겪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 문제를 천착하면서 작품세계의 분수령이 되는 『참회록』(1879)을 내놓았고, 정치, 사회, 종교, 사상적 문제들에 관해 계속해서 저술하고 활동했다.

또한 술과 담배를 끊고 손수 밭일을 하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하며, 빈민 구제 활동도 했다.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고,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과 『크로이처 소나타』(1889)를 통해 깊은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었으며, 말년까지도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와 『부활』(1899) 등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 『바보 이반과 그의 두 형제 이야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 땅이 많이 필요한가?』, 『세 가지 질문』 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극단적인 도덕가가 되어 1880년 이후에 낸 일련의 저술에서 국가와 교회를 부정하고, 육체의 나약함과 사유재산을 비난하는 의견을 발표했다. 저작물에서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저작권을 포기하는 선언을 했고(1891),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출간되자마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번역되었으며, 출판으로 인한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1901년 『부활』에 러시아 정교를 모독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종무원(宗務院)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통해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1886), 『크로이처 소나타』(1889), 『예술이란 무엇인가』(1897), 『부활』(1899) 등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사유재산과 저작권 포기 문제로 시작된 아내와의 불화 등으로 고민하던 중 1910년 집을 떠나 폐렴을 앓다가 현재 톨스토이 역이 되어 있는 아스타포보 역장의 관사에서 82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임종 때 아내를 보기를 거부한 톨스토이의 마지막 말은 “진리를……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 왜 사람들은……”이었다.

귀족의 아들이었으나 왜곡된 사상과 이질적인 현실에 회의를 느껴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추구했다. 그는 고귀한 인생 성찰을 통해 러시아 문학과 정치, 종교관에 놀라운 영향을 끼쳤고, 인간 내면과 삶의 참 진리를 담은 수많은 걸작을 남겨 지금까지도 러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대문호로 존경받고 있다. 인간과 진리를 사랑했던 대문호 톨스토이. 그는 세계 문학의 역사를 바꾼 걸작들을 남긴 소설가이자 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까지 영향을 준 ‘무소유, 무저항’의 철학을 남긴 사상가였다. 톨스토이의 작품만이 지닌 문체와 서사적 힘은 지금 보아도 여전하다. 특히 소설 속 아름다운 풍경 묘사와 이야기의 서사성, 섬세한 인물 심리 묘사 등이 돋보이며, 오늘날까지도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로 인정받고 있다.
저 :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쉬킨 (Aleksandr Sergeevich Pushkin,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러시아 시인. 모스크바 출생. 러시아 국민문학의 창시자이다. 러시아 국민의 한결 같은 사랑을 받아온 최고의 국민 시인 푸쉬킨.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은 1799년 6월 6일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근교에서 600년 전통의 유서 깊은 귀족 혈통으로 출생했다. 1811년 차르스코에셀로(지금의 푸슈킨시)에 개설된 귀족학교 리체이에 입학, 이 시절 자유주의 의식이 싹트고 야만적인 농노제로 신음하던 러시아 현실에 대해 깊... 러시아 시인. 모스크바 출생. 러시아 국민문학의 창시자이다. 러시아 국민의 한결 같은 사랑을 받아온 최고의 국민 시인 푸쉬킨.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은 1799년 6월 6일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근교에서 600년 전통의 유서 깊은 귀족 혈통으로 출생했다. 1811년 차르스코에셀로(지금의 푸슈킨시)에 개설된 귀족학교 리체이에 입학, 이 시절 자유주의 의식이 싹트고 야만적인 농노제로 신음하던 러시아 현실에 대해 깊은 각성을 하게 된다. 자유주의적 교풍 속에서 1814년 『나의 친구, 시인에게』를 발표하여 문학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처음엔 선배이자 낭만주의 시인인 K.N.바튜슈코프, V.A.주코프스키 등 17.18세기 프랑스 시인들의 시풍을 따랐다. 1817년 리체이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근무하며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적 사상가 P.Y.차다예프와 사귀고, 러시아 전제정치를 타도하려 한 무장봉기단체 데카브리스트의 그룹에 참여하는 등, 농노제 타도 정치사상이 확고해졌다. 데카브리스트의 사상에 공명하여 자유를 사랑하는 내용의 송시 「자유」(1817), 농노제 붕괴를 예언한 「농촌」(1819) 등 일련의 과격한 정치적 시를 써서 남러시아로 추방되었다.

G.G.바이런의 영향을 받고, 그곳에서 『카프카스의 포로』(1822), 『도둑 형제』(1821∼22), 『바흐치사라이의 샘』(1821∼23) 등의 작품 소재를 얻었다. 1820년 러시아 민간전승에서 취재한 동화풍 담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하여 젊은 세대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이후 비밀 결사와의 친교, 보론쏘프 장군의 아내와의 사랑, 아버지와의 불화, 나탈리야와의 열애와 결혼 등 1833년 가을 페테르부르그로 돌아오기까지 개인적인 불운과 고난 속에서 유명한 운문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1823~1831)을 비롯, 서사시 『집시들』『청동의 기사』 중편소설『벨킨의 이야기』『스페이드 여왕』과 비극『모차르트와 살리에리』등 많은 작품들을 발표한다.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의 리얼리즘 작품인 『예브게니 오네긴』을 쓰기 시작한 1823년 무렵에는 낭만주의 한계를 의식하게 되었으며, 『집시』(1824)에서 바이런적 주인공에 대한 비판의 눈길로 개인과 사회, 자유와 운명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24년 무신론을 긍정한 편지가 압수되면서 미하일로프스코에 마을에 연금된 동안, 비극시 「보리스 고두노프」(1825), 풍자적 서사시 「누손백작」(1825) 등을 완성하였다. 고독하고 불우한 유폐생활을 통해서 사상적.예술적 성장을 하게 되고 러시아 국민시인으로 성숙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26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특사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그뒤 만년까지 관헌의 엄중한 감시와 검열을 받았다. 아버지가 물려준 땅 니제고르드주에 갔을 때 콜레라로 발이 묶인 3개월이 창작의 정점을 이루는 시기가 되었는데, 단편소설집 『벨킨 이야기』, 4편의 작은 비극 『돌의 손님』, 『인색한 기사』,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질병 때의 주연(酒宴)』 등 50편의 작품을 썼으며, 『예브게니 오네긴』의 기본적 부분도 이때 완성되었다.

나탈리야와의 결혼은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궁정행사에 그녀가 참석하기를 바라는 황제에 의하여 푸슈킨은 시종보로 임명되었다. 이는 창작하는 시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으나, 세속권력과의 충돌 속에서 역사적 시야를 확대해 가며, 표트르대제의 공적을 기리면서 그 희생이 된 페테르부르크 소시민의 비극을 묘사한 서사시 『청동의 기사』(1833), 소설 『스페이드 여왕』(1834), 역사소설 『대위의 딸』 등을 발표했다. 1837년에 자신의 아내와 염문을 일으킨 프랑스인과의 결투 도중에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저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D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소설가이다. 반 독자들에게는 언젠가는 읽어야 할 작가, 평론가들에게는 가장 문제적인 작가, 문인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작가 제1순위로 꼽히는, 그 영향력에 있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작가이다. 풀 네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0월 30일(신력으로는 11월 11일) 군의관이었던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소설가이다. 반 독자들에게는 언젠가는 읽어야 할 작가, 평론가들에게는 가장 문제적인 작가, 문인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작가 제1순위로 꼽히는, 그 영향력에 있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전무후무한 작가이다. 풀 네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10월 30일(신력으로는 11월 11일) 군의관이었던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스크바 빈민 병원에서 일했으며, 잔인할 정도로 엄격한 성격의 소지주였다. 종교적이고 온화한 성격의 어머니와는 달리, 잔혹한 아버지의 이미지는 도스토옙스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그의 작품 속 아버지들은 처음부터 부재하거나, 무능하거나, 잔학하여 자신의 자식들을 길거리로 내몰아 몸을 팔게 하거나, 자식들에게 살해당하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자녀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심지어 성적인 폭군으로 등장하거나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나고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은 그의 아버지가 의사로 일하던 모스크바 빈민 병원이었는데, 그 병원의 많은 환자들은 모두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으며, 어린 도스토옙스키는 이들과 대화하기를 즐겼다. 그때의 경험과 배움은 평생의 문학적 자산이 되었다. 가난의 심리학의 대가가 될 씨앗이 여기서부터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작가 스스로도 평생을 가난의 굴레에서 허덕였다. 그는 돈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현실적”이지 못했던 사람이고, 자신이 감당할 능력이 있건 없건 간에 떠넘겨지는 짐을 사양할 줄 몰랐다. 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를 졸업했지만 문학의 길을 택한 뒤,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1846)로 당시 러시아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당시 비평계의 거물이던 벨린스키에게 ‘새로운 고골’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서 『분신』, 『주부』, 『백야』, 『네트치카 네즈바노바』 등을 집필하면서 혁명가들과 교루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1846년)에는 작가의 가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가난이 인간 심리와 삶에 끼치는 영향들, 그리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강한 동정심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은 당대 최고의 문학 비평가 베를린스키로부터 “러시아 최초의 사회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런 젊은 날의 도스토옙스키에게 형제애 속에서 모두가 풍요롭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르치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인 페트라솁스키 서클은 목마른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반가운 만남이었다. 하지만 차르 니콜라이 1세의 반동 정치하에서는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유토피아 등에 대해 토론하는 것, 금지 서적을 읽는 것들만으로도 총살감이었다. 1849년부터 공상적 사회주의의 경향을 띤 페트라셰프스키 모임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도스토옙스키는 사형은 간신히 면했으나 시베리아로 끌려갔고, 4년간의 감옥 생활과 또 4년간의 유형이 끝난 후, 도스토옙스키의 인간관 및 세계관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1840년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도스토옙스키는 1860년대 완전히 극우 보수주의자(슬라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유형을 마치고 돌아온 작가는 1861년 러시아의 문화적 정치적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그의 형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Время)]를 창간했고, 1863년 [시대]지가 정치적 이유로 발행정지 조치를 받게 되어 폐간된다. 이듬해 형 미하일과 함께 두 번째 잡지, 더욱더 극우적이고 슬라브주의적인 잡지 [세기(Эпоха)]를 발간하여, 그 첫 호에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발표한다. 1861년 『학대받은 사람들』을 발표하면서 문단으로 복귀했다. 1866년, 후에 그의 부인이 된 속기사 안나를 고용하여 『노름꾼』과 『죄와 벌』을 속기하게 하여 발표하고, 1868년 그리스도를 닮은 “긍정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고자 한 『백치』를, 1872년 『악령』을, 죽기 한 해 전인 1880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모두 [러시아 통보]에 발표했다. 『죄와 벌』은 가난하고 약한 자의 고통과 굴욕을 리얼하게 묘사한 걸작이며, 만년의 미완성 대작인 『카라마조프의 형제』(1880) 또한 당시 러시아 사회의 실상을 여실히 그리면서 종교와 인간의 본질을 헤집는다. 그는 세계 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체호프, 헤밍웨이 같은 작가들부터 니체와 후대의 실존주의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후세에 광범위한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세계문학사 중 가장 위대한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1881년 1월 28일, 폐동맥 파열로 사망했으며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네프스카야 대수도원 묘지에 안치되었다. 러시아 철학자 니콜라이 베르댜예프가 말한 것처럼,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지구상에 러시아인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제대로 접한 독자라면 베르댜예프의 이 말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의 작품을 통해 니체에서 현대의 실존주의로까지 그의 사상적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선과 악, 성(聖)과 속(俗), 과학과 형이상학의 양극단 사이에서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사상가로서 도스또예프스끼는 당대에 첨예하게 대립했던 사회적, 철학적 문제들을 진지하게 제기하고 숙고한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도 변치 않는 삶의 영원한 가치를 전해 준다.

‘넋의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정치적·사회적으로 복잡화된 인간의 내면 심리를 그려내며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농노제적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들어서는 과도기 러시아의 시대적 모순을 자신의 작품 세계에 투영하면서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지하생활자의 수기』,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이 있다.
저 :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콥스키 (Vladimir Vladimirovich Mayakovskii,Влади?мир Влади_мирович Маяко_вский)
소련의 시인, 극작가, 배우이다. 조지아의 한촌(寒村) 바그다티의 산림관(山林官)의 집에서 태어났다. 바쿠 유전지대의 혁명적 분위기가 소년기의 마야콥스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부친 사망 후 모스크바로 옮겨 볼셰비키 혁명 운동에 가담, 2년간에 세 번이나 체포되었다. 그 후 모스크바의 미술학교에 입학, 미래파 시인 그룹에 속하면서 과거의 문학유산 및 부르주아 문학의 전통에 철저한 반항을 보였다. 노란빛 자켓을... 소련의 시인, 극작가, 배우이다. 조지아의 한촌(寒村) 바그다티의 산림관(山林官)의 집에서 태어났다. 바쿠 유전지대의 혁명적 분위기가 소년기의 마야콥스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부친 사망 후 모스크바로 옮겨 볼셰비키 혁명 운동에 가담, 2년간에 세 번이나 체포되었다. 그 후 모스크바의 미술학교에 입학, 미래파 시인 그룹에 속하면서 과거의 문학유산 및 부르주아 문학의 전통에 철저한 반항을 보였다. 노란빛 자켓을 허리 아래까지 내려뜨려 사람들을 몹시 놀라게 하는 화려한 시위로 유명해진 마야콥스키는 실제 작품면에서도 「바지를 입은 구름」(1915)이나 「등뼈로 만든 플롯」(1916) 등의 거친 리리시즘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마야콥스키는 혁명을 '나의' 혁명으로 받아들여 인간의 해방을 초래하고 개인의 역량을 개화시키는 혁명의 승리를 노래했다. 그는 모든 재능을 혁명의 대의명분을 위해 바쳤고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와 나날의 생활 속에서 시의 제재(題材)를 찾았다.

그의 시법 또한 혁명적이었다. 토막토막 짤린 짧은 시구문이 그랬고 의미 및 음조를 강조할 수 있도록 단어를 행으로 나누어 나열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일상어의 교묘한 구사와 거친 유머의 사용도 혁명적이었다. 그는 집회나 공장에서 자작의 시를 자주 낭독했는데 그의 이러한 낭송하기 용이한 시는 고정화된 시어의 파괴를 지향했고 억센 힘과 동적인 비유에 충만해 있었다. 거기에다 뛰어난 서정적 재능과 기발한 발상 및 넘치는 유머 감각으로 해서 그의 작품이 단순한 프로퍼갠더로 전락되는 것을 막고 있다. 특히 혁명 초기의 작품이 그러하여 유토피아적이고 예언적인 밝음이 있다.

혁명 전부터 전위시인(前衛詩人)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그의 창조적인 정열이 폭발한 것은 10월 혁명 이후로서 1918년 소련 극문학의 제일성(第一聲)이 된 「미스테리 부프」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장대한 비유형식을 빌려 혁명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미래의 사회를 엮은 것으로 아리스토파네스를 연상케 하는 활력이 있다. 다음 희곡 「빈대」(1928)와 「목욕탕」(1929)은 몽환희곡(夢幻戱曲), 혹은 기상천외의 풍자적 수법으로 시정인(市井人)의 근성과 관료주의를 폭로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비난한 서사시 「150000000」(1920)도 공상의 비약과 거친 유머에 차 있다. 20년대에 들어와 미래파의 옛 동지들을 중심으로 한 잡지 [레프](예술좌익전선)를 발간, 전위적 문학운동의 중핵이 되는 한편, 레닌의 죽음을 노래한 「블라디미르 일리이치 레닌」(1924) 등을 내놓았다.

그러나 혁명의 정열을 격렬하게 노래하는 가운데 내부로부터 좌절감이 싹텄고 시사적 문제에 관해 노래하는 것이나 시를 낭독하는 일에도 싫증이 났다. 그의 국가에 대한 봉사는 자발적으로 자신이 부과한 의무였으나 그 노력도 헛되어 당시 점차로 재편성기에 접어든 문학계의 공적 권위자들이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1930년 4월 권총 자살을 했는데 죽기 직전에 쓴 유고에는 "사랑하는 작은 배는 세속에 충돌했다"고 씌어 있었다. 그의 자살은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스탈린이 그를 소비에트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세르게이 예세닌처럼 냉대를 받지는 않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의 명성은 높다.
저 :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 (Sergei Aleksandrovich Esenin,Серге_й Алекса_ндрович Есе_нин)
러시아의 시인. 1895년 10월 3일 랴잔 지방의 콘스탄티노보 마을에서 태어났다. 1909년, 세르게이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스파스 클레프키 마을에 있는 교사 세미나에 갔는데 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지도교사의 조언에 따라 시작(詩作)에 몰두하기 위해 그는 1913년 3월 모스크바로 떠났다. 1915년 3월 9일, 상징주의 시의 대가 알렉산드르 블로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러시아의 시인. 1895년 10월 3일 랴잔 지방의 콘스탄티노보 마을에서 태어났다. 1909년, 세르게이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스파스 클레프키 마을에 있는 교사 세미나에 갔는데 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지도교사의 조언에 따라 시작(詩作)에 몰두하기 위해 그는 1913년 3월 모스크바로 떠났다.

1915년 3월 9일, 상징주의 시의 대가 알렉산드르 블로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갑자기 진땀을 흘리기까지 했다. 블로크는 예세닌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등 도움을 주었으며 그를 “천부적인 재능의 농민시인”으로 불렀다. 예세닌은 자신이 블로크와 클류예프로부터 서정시풍을 배웠고, 벨리로부터는 형식을 배웠다고 주장했다.

1916년 2월, 첫 시집인 『초혼제』가 출간되자, 예세닌의 명성은 순식간에 높아져 황후와 공주들 앞에서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황금 시계와 목걸이를 받았다. 그러나 예세닌은 혁명에 동감해서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을 열렬히 환영했다.

예세닌은 1919년을 자기 생애의 최고의 해로 간주했다. 그에게 서점과 출판사, 보헤미안 문학 카페인 ‘페가수스의 마구간’에 대한 감독권이 주어졌다. 이 시기 그는 여러 시인들과 함께 ‘이미지 그 자체’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이미지주의 문학 그룹을 조직해서 활동했다. 1918년 혹은 1919년에 예세닌은 공산당에 가입하고자 지원했다. 그러니 그는 너무나 개인적이고 ‘어떤 혹은 모든 규율에 이질적’이라고 간주되었다. 이러한 열정적인 사회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에서는 점차 소외와 고독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1921년에 그는 “흔히, 서정시인은 오래 살지 못한다” 라고 적는다.

1921년 11월, 예세닌은 미국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을 만났다. 그녀는 그보다 열일곱 살 연상이었다. 그들은 1922년 5월 2일 결혼했고, 5월 10일 유럽과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들의 미국 생활은 파란만장한 시간이었다. 그는 뉴욕을 혐오했으며 자살을 생각할 만큼 권태로웠다. 그는 예술에 대한 자신의 영감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예세닌은 덩컨과 함께 파리로 돌아갔다. 음주와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1923년 8월 5일경 그들은 모스크바로 되돌아왔고 10월 말 경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났다. 예세닌은 권태와 우울증에 빠졌으며, 알코올 중독과 환각으로 고통을 받았다. 정신적 안식처를 발견할 수 없었던 그는 두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무력감을 느꼈다.

1925년, 예세닌은 장시 「페르시아 모티프」와 「안나 스네기나」를 썼던 바쿠로 갔다. 환각이 그랬던 것처럼 피해망상증도 그의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11월 그는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12월 21일 그는 갑자기 병원을 떠나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페테르부르크로 떠나 호텔에 투숙해 12월 28일, 성상(聖像)이 놓인 구석의 수도관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제정 러시아의 시인. 염세적인 고뇌와 깊은 사색을 바탕으로 하여 섬세한 필치로 쓴 서정시를 남겼으며, 작품에 시집 『황혼』, 『최후의 죽음』 등이 있다. 알렉산더 푸쉬킨에 의해 최고의 러시아 시인으로 찬사를 받았다. 제정 러시아의 시인. 염세적인 고뇌와 깊은 사색을 바탕으로 하여 섬세한 필치로 쓴 서정시를 남겼으며, 작품에 시집 『황혼』, 『최후의 죽음』 등이 있다. 알렉산더 푸쉬킨에 의해 최고의 러시아 시인으로 찬사를 받았다.
저 : 가브릴라 데르자빈 (Gavrila Romanovich Derzhavin,Гаврии_л (Гаври_ла) Рома_нович Держа_вин)
러시아의 시인. 가난한 귀족 출신으로, 사병생활 끝에 장교가 되어 군대복무를 오래 하다가 나중에는 문관이 되었다. 40세가 다 되어 「펠리차」라는 예카테리나 여제를 찬양한 한편의 시를 그녀에게 바쳤고 이 시로 일약 문명을 떨쳐 관직도 높아졌다. 데르자빈의 시는 고전주의적 장중성은 있으나 답답한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점에 특징이 있고, 문체는 우미하면서도 발랄함을 잃지 않았으며 화려하면서 동시에 리얼리티를 갖추고 ... 러시아의 시인. 가난한 귀족 출신으로, 사병생활 끝에 장교가 되어 군대복무를 오래 하다가 나중에는 문관이 되었다. 40세가 다 되어 「펠리차」라는 예카테리나 여제를 찬양한 한편의 시를 그녀에게 바쳤고 이 시로 일약 문명을 떨쳐 관직도 높아졌다. 데르자빈의 시는 고전주의적 장중성은 있으나 답답한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점에 특징이 있고, 문체는 우미하면서도 발랄함을 잃지 않았으며 화려하면서 동시에 리얼리티를 갖추고 있었다. 18, 19 양 세기에 걸쳐 시단에 군림하면서 국가의 영광, 철학적 사색, 생활의 기쁨을 노래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1743년 7월 14일(구력 7월 3일) 카잔 지방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1816년 7월 20일(구력 7월 8일) 노브고로드 지방의 즈반카에서 죽었다.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데르자빈은 카잔의 김나지움을 마치고 1762년 사병으로 입대했고, 1772년 장교로 임관되었다. 1773년 푸가초프의 난이 일어나자 그의 소속 부대는 반란군 진압 작전에 참여했다. 이 사건 이후 177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무부 관리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공직 생활 26년 동안 올로네츠와 탐보프의 지방 장관과 상원 의원, 그리고 법무장관을 지냈다. 관리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데르자빈은 18세기 러시아 시인으로서 독창적인 서정시와 송시를 많이 남겼다. 그가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펠리사」(1782)를 발표하면서부터다. 「펠리사」는 전체가 260행으로 구성된 송시로서, 한편으로는 계몽 군주로서의 예카테리나 여제를 칭송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하들의 아첨과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예카테리나 대제에게 그 송시를 바쳐 여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계관시인이 되는 명예를 얻기까지 하였다. 한동안 여황제의 개인 비서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정치 성향 때문에 1803년 공직에서 물러나 노브고로드 지방의 즈반카에 있는 영지로 돌아와 생활했다. 이곳에서 그는 시와 산문, 드라마와 회고록을 쓰면서 만년을 조용히 지냈다.

데르자빈의 다양한 시들을 소재나 주제에 따라 그룹을 지어보면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의 시는 크게 송시와 아나크레온풍의 인생의 쾌락을 노래한 시로 구분된다. 데르자빈의 시 작품들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말년에 집중적으로 창작한 아나크레온풍의 시들이다. 그 시들은 즐겁고 감각적인 관능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삶에 대한 예찬과 사랑으로 고취되어 있다.
저 : 이반 안드레예비치 크릴로프 (Ivan Andreevich Krylov,Ива_н Андре_евич Крыло_в)
우화시를 주로 쓴 러시아의 시인.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렸을 때 육군사관이던 부친을 잃고 역경 속에서 자랐다. 178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긴 뒤 평생을 그 곳에서 보냈다. 1789년부터 풍자 잡지의 편집에 종사하는 한편, 수편의 희극 및 희가극을 썼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게다가 농노제에 대한 풍자를 이유로 잡지는 정간처분을 당했다. 그 뒤 수년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1805년 우화시 「떡갈나무와 갈대」를... 우화시를 주로 쓴 러시아의 시인.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렸을 때 육군사관이던 부친을 잃고 역경 속에서 자랐다. 178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긴 뒤 평생을 그 곳에서 보냈다. 1789년부터 풍자 잡지의 편집에 종사하는 한편, 수편의 희극 및 희가극을 썼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게다가 농노제에 대한 풍자를 이유로 잡지는 정간처분을 당했다. 그 뒤 수년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1805년 우화시 「떡갈나무와 갈대」를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이솝이나 라퐁텐의 우화를 모방하였으나 차츰 독창적인 러시아의 우화를 창작하였다. 1809년에 최초의 『우화』 시집을 발간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부터 명성이 높아져, 우화시 창조를 천직으로 하여 평생을 통해 205편을 써서 우화시를 민중생활에 도입했다. 또한 민중어를 자유로이 구사하여 러시아 문장어의 발전에 끼친 공이 크다.

크릴로프의 우화는 시 형식으로 되어 있고 총 205편이 있다. 이 가운데 45편은 이솝(기원전 6세기경의 사람), 라 퐁텐 등의 개작인데도 자작의 것과 다름없을 만큼 러시아화되어 있다. 작자의 생전에 약 7만 5천 부가 팔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취재범위가 넓으며 동물과 식물 등 온갖 것이 등장하여 인간의 우매함, 아첨, 허영, 사회관습, 전제정치 체제 등을 풍자한다. 그리고 이 풍자는 모랄리스트로서의 작자의 성격과 건전한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의 우화는 민중의 말을 대담하게 도입하여 민중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점에 의의가 있다.
저 : 표도르 솔로구프 (Sologub, Fyodor Kuz'mich,표도르 쿠지미치 테테르니코프 Фёдор Кузьми_ч Тете_рников)
표도르 쿠지미치 테테르니코프(Фёдор Кузьми_ч Тете_рников). 1863년 2월 17일 페테르부르크에서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가 죽은 뒤 가정부가 된 어머니를 따라 귀족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주인집의 배려로 김나지야에서 교육을 받았다. 1882년 페테르부르크의 사범학교를 마친 후 노브고로드 근처의 한 지방 도시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전근과 발령으... 표도르 쿠지미치 테테르니코프(Фёдор Кузьми_ч Тете_рников). 1863년 2월 17일 페테르부르크에서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가 죽은 뒤 가정부가 된 어머니를 따라 귀족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주인집의 배려로 김나지야에서 교육을 받았다. 1882년 페테르부르크의 사범학교를 마친 후 노브고로드 근처의 한 지방 도시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전근과 발령으로 10여 년간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녔고 이때 경험한 러시아 지방 도시의 생활과 환경들이 그의 문학 작품에 생생히 묘사되고 있다. 대표작 『찌질한 악마』는 도스토옙스키 이래 가장 완벽한 러시아 소설이라는 극찬을 받았으며, 이 작품으로 솔로구프는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작가가 되었다. 열두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1884년, 잡지 [봄]에 시 「여우와 고슴도치」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이후 많은 시와 소설을 꾸준히 잡지에 발표하고 단행본으로 펴냈다. 「니토츠킨의 실수」(1894)와 「무덤에서 나온 주교」(1927)를 비롯해 백여 편의 단편소설을 썼고, 시선집 『시, 제1권』(1896), 『뱀』(1907) 등을 펴냈으며 장편으로 『악몽』(1895), 『창조되는 전설』(1912) 등을 출간했다.
러시아 상징파의 대표적 시인, 소설가, 이론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선구적으로 러시아 모더니즘 문학을 주창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유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프랑스 상징파에 영향을 받아 1893년 시문집 『러시아 상징파』를 출판하여 러시아 상징주의의 시초가 되었다. 1904년 러시아 상징파 최대의 잡지 [천평칭(天平秤) Vesy]를 창간하여 이후 상징파가 쇠퇴하기 까지 그 중심에 있으면서 벨... 러시아 상징파의 대표적 시인, 소설가, 이론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선구적으로 러시아 모더니즘 문학을 주창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유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프랑스 상징파에 영향을 받아 1893년 시문집 『러시아 상징파』를 출판하여 러시아 상징주의의 시초가 되었다. 1904년 러시아 상징파 최대의 잡지 [천평칭(天平秤) Vesy]를 창간하여 이후 상징파가 쇠퇴하기 까지 그 중심에 있으면서 벨리, 블로크를 키워냈으며, 나아가서는 미래파(미래주의)를 육성하였다.

대표적 작품으로 시집 『도시와 세계』(1903), 『화관(花冠)』(1906) 등이 있고, 소설 , 『불꽃의 천사』(1907~1908), 『승리의 제단』(1911~1912)과 단편집 『지축(地軸)』(1911) 등이 있다. 그 밖ㅇ ㅔ평론과 희곡 작품도 다수 남아 있다.

1910년에 상징주의 운동과 결별하고 혁명 후에는 문학을 가으이했으며 죽을 때까지 강의와 출판 일을 했다. 그는 번역문학가이자 비평가로서, 그리고 수필가로서 러시아 근대 시의 위상을 고양시키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러시아의 철학자, 신학자, 시인, 팸플릿 및 문학 비평가. 모스크바 국립대학 총장을 역임한 아버지 세르게이 솔로비요프와 우크라이나 철학자 스코보로다 가문 출신의 어머니 폴릭세나 블라디미로브나 사이에서 1853년 1월 16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물리수학과 역사철학을 전공했다. 철학자, 신학자, 윤리학자, 신비주의자, 정치사상가, 시인, 문학비평가로서 남긴 뛰어난 학문적 업적으로 19세기 세... 러시아의 철학자, 신학자, 시인, 팸플릿 및 문학 비평가. 모스크바 국립대학 총장을 역임한 아버지 세르게이 솔로비요프와 우크라이나 철학자 스코보로다 가문 출신의 어머니 폴릭세나 블라디미로브나 사이에서 1853년 1월 16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물리수학과 역사철학을 전공했다. 철학자, 신학자, 윤리학자, 신비주의자, 정치사상가, 시인, 문학비평가로서 남긴 뛰어난 학문적 업적으로 19세기 세계지성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은 책과 논문으로 『서구 철학의 위기』(1874), 『총체적 지식의 철학적 기반』(1877), 『추상적인 원천들의 비판』(1877~1880), 『신인성에 관한 강의』(1878~1881), 『러시아의 민족 문제』(1883~1888), ?중국과 유럽?(1890), 『시집』(1891~1900), 『선의 변호』(1894~1897), 『세 편의 대화』(1899~1900) 등이 있다.
1880년 11월 1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했다. 그는 러시아 문화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귀족 인텔리겐치아 집안 출신이다. 부친과 조부는 대학 교수였고, 외조부는 유명한 생물학자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총장을 역임한 알렉세이 베케토프(А. Н. Бекетов)다. 블로크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졸업했다. 시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 사실상 결별했다. 블로크는 외가에서 자라며, 인문적인 가풍 속에서... 1880년 11월 1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했다. 그는 러시아 문화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귀족 인텔리겐치아 집안 출신이다. 부친과 조부는 대학 교수였고, 외조부는 유명한 생물학자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총장을 역임한 알렉세이 베케토프(А. Н. Бекетов)다. 블로크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졸업했다. 시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 사실상 결별했다. 블로크는 외가에서 자라며, 인문적인 가풍 속에서 일찍이 시에 눈을 떴다.

블로크는 1903년 잡지 [새로운 길(Новый путь)]을 통해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등단했다. 1904년 출간된 첫 시집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시(Стихи о Прекрасной Даме)』는 러시아 상징주의 시인들에 의해 열렬히 환영받았다. 그러나 이 무렵 블로크는 이미 초기 시의 이상과 서서히 결별하고 있었다. 첫 시집 출간 이후 1905∼1910년에 이르는 시기에 블로크의 창작 활동은 절정에 달했다. 시인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열기와 격동의 시적 체험을 연이어 상자된 네 권의 시집에 담았다. 블로크는 또한 1908년 『서정적 희곡집(Лирические драмы)』을 출간했다. 블로크는 이후 두 편의 드라마([운명의 노래(Песня Судьбы)](1908)와 [장미와 십자가(Роза и Крест)](1913)를 더 집필했다.

블로크의 창작에 있어 1910년대는 새로운 정신적 토대의 모색과 시의 운명의 본질적인 전환과 더불어 찾아왔다. 블로크는 1911∼1912년 다섯 권의 시집을 세 권의 『시 모음집(Собрание стихотворений)』으로 편찬하고자 심혈을 기울인다. 이때부터 블로크의 시는 독자의 의식 속에서 단일한 ‘서정적 3부작’으로서, ‘길의 신화(миф о пути)’를 창조하는 독특한 ‘시 소설’로서 존재하기 시작한다. ‘3부작’의 이상은 시인의 삶과 창작의 토대로 자리했고, 이후의 두 판본(1916년과 1918∼1921년)에서 변함없이 견지되었다. 생의 마지막 해인 1921년 블로크는 새로운 판본의 준비에 착수했으나 1권을 마무리하는 데 그쳤다. 편집인으로서 블로크가 펴낸 『아폴론 그리고리예프 시집(Стихотворения Аполлона Григорьева)』(1916)은 19세기의 잊혀진 ‘마지막 낭만주의 시인’을 부활시켰다.

1915∼1916년에 이르러 블로크의 창작 활동은 현저하게 쇠퇴한다. 자신의 세대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전체의 운명을 그리고자 블로크가 1914년 집필하기 시작한 서사시 [보복(Возмездие)]은 미완으로 남았다. 1차 대전의 암운과 징집은 시인에게 정신적 공동화를 안겼다. 2월 혁명과 더불어 페테르부르크(당시에는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블로크는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조사위원회에 관여했다. 1917년 단 한 편의 시도 쓸 수 없었던 블로크는 10월 혁명 이후 ‘혁명이 지닌 정화의 힘’에 대한 믿음으로 고양되어 정신적 소생을 맞이한다. 1918년 1월 마지막으로 찾아온 짧고 격렬한 창조적 열기 속에서 블로크는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든 서사시 [열둘]과 시 [스키타이], 그리고 에세이 [인텔리겐치아와 혁명]을 썼다.
마지막 불꽃은 이내 시들었다.

1921년에 이르러 시를 쓸 수 없는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블로크는 창작을 대신하여 혁명정부 산하의 문화 기구들에서 일하며 문화 보존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문화철학 강연에 몰두한다. 애초에 블로크의 문화 계몽 활동은 민중에 대한 인텔리겐치아의 책임 의식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정화의 불길로서의 혁명’의 이상과 전체주의적인 소비에트 관료 정권의 실상 사이의 괴리에 대한 뼈아픈 인식은 블로크를 깊은 환멸과 새로운 정신적 지주의 추구로 이끌었다. 말년의 그의 에세이와 수기를 관류하는 ‘문화의 카타콤’의 모티프가 그렇게 대두된다. 시인이 감당할 수 없었던 말년의 우울은 심장병을 동반한 정신착란으로 심화되었다. 1921년 8월 7일 시인은 영면했다.
저 : 마리나 이바노브나 츠베타예바 (Марина Ивановна Цветаева)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에 첫 시집 『저녁의 앨범』(1910)을 발표했다. 어떤 동인 그룹에도 속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창작의 길을 걷던 중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을 경험하며 글을 썼으며 혁명의 결과로 인한 모스크바 기근을 겪었다. 1922년 딸과 함께 프라하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콘스탄틴 로드제비치와 사랑에 빠져 포에마 「끝의 시」를 썼다. 1925년에는 파리로 이주했고, 1926년에는 시...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에 첫 시집 『저녁의 앨범』(1910)을 발표했다. 어떤 동인 그룹에도 속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창작의 길을 걷던 중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을 경험하며 글을 썼으며 혁명의 결과로 인한 모스크바 기근을 겪었다. 1922년 딸과 함께 프라하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콘스탄틴 로드제비치와 사랑에 빠져 포에마 「끝의 시」를 썼다. 1925년에는 파리로 이주했고, 1926년에는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셋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러시아로 돌아온 뒤에는 남편과 딸의 체포, 소비에트 문단으로부터의 고립, 극도의 궁핍 등으로 힘든 삶을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타타르스탄의 옐라부가로 피난했다가 1941년 8월 31일 목을 매 자살했다. 대표작으로는 시집 『수공업』(1923), 『러시아를 떠나』(1928), 포에마 「쥐잡이」(1925) 등이 있다.
저 : 소피야 야코블레브나 파르노크 (Sophia Parnok,София Яковлевна Парнок)
‘러시아의 사포’로 알려진 시인인 파르노크는 러시아 남부 타간로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그녀는 당시의 지배적인 시인들과는 매우 다른 스타일로 시를 썼고, 대신 자신의 러시아인, 유대인 정체성, 레즈비언주의의 감각을 드러냈다. 1913년부터는 문학잡지 [북방의 수기Северные записк¡и]에 안드레이 폴랴닌Андрей Полянин이라는 남자 이름으로 시와 비평을 발표했다. 이 시기 두 ... ‘러시아의 사포’로 알려진 시인인 파르노크는 러시아 남부 타간로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그녀는 당시의 지배적인 시인들과는 매우 다른 스타일로 시를 썼고, 대신 자신의 러시아인, 유대인 정체성, 레즈비언주의의 감각을 드러냈다. 1913년부터는 문학잡지 [북방의 수기Северные записк¡и]에 안드레이 폴랴닌Андрей Полянин이라는 남자 이름으로 시와 비평을 발표했다. 이 시기 두 해 정도 지속된 마리나 츠베타예바와의 강렬한 연애가 유명하다. 죽기 얼마 전 소도시 카쉰에서 물리학자인 니나 베데네예바Н. Е. Веденеева를 우연히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다. 1930년대에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시를 발표하지 못하고 번역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모스크바 근교 카린스코예 마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주요 시집으로는 『피에리아의 장미Розы Пиерии』(1922), 『포도 넝쿨Лоза』(1923), 『음악Музыка』(1926), 『속삭이는 목소리로Вполголоса』(1928) 등이 있다.
저 : 표도르 이바노비치 튜체프 (Фёдор Ива?нович Тю?тчев)
러시아의 서정시인. 모스크바 태생의 귀족 출신으로서 평생을 외교관 생활로 보냈다. 처음에 푸시킨 그룹의 한 사람으로 출발했으나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후에 네크라소프의 소개로 각광을 받았다. 자연을 테마로 한 철학시가 많고 범신론·이원론적이다. 현실 세계와 이를 지배하는 카오스의 바다 대립을 낮과 밤, 빛과 어둠, 선과 악, 사랑과 죽음 등의 상징으로 나타냈는데 후의 상징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03년... 러시아의 서정시인. 모스크바 태생의 귀족 출신으로서 평생을 외교관 생활로 보냈다. 처음에 푸시킨 그룹의 한 사람으로 출발했으나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후에 네크라소프의 소개로 각광을 받았다. 자연을 테마로 한 철학시가 많고 범신론·이원론적이다. 현실 세계와 이를 지배하는 카오스의 바다 대립을 낮과 밤, 빛과 어둠, 선과 악, 사랑과 죽음 등의 상징으로 나타냈는데 후의 상징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803년 모스크바 근교 옵스투그에서 오래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옵스투그에 있는 가문의 영지에서 보냈다. 그의 가족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제에 입각한 지주의 풍습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튜체프는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튜체프 자신 또한 어린 시절부터 학업에 대한 특별한 열정을 보였다. 그의 가정교사는 시인이자 번역가로 유명했던 라이치(C. E. Raich, 1792∼1855)였는데, 라이치는 튜체프에게 고대문학과 고전 이탈리아 문학을 탐독하게 했다. 열두 살이 되던 해에 튜체프는 라이치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로마시대 시인들의 시를 번역하기도 했으며, 그 시를 모방한 시를 쓰기도 했다.

1819년 튜체프는 모스크바대학의 문학창작부에 입학했다. 이때 그는 포고딘(M. Погодин), 셰비레프(С. Шевырев), 오도옙스키(В. Одоевский)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으며, 그 결과 슬라브주의자로서의 시각을 형성하게 된다. 튜체프는 학업에 정진하면서도 많은 시를 썼다. 하지만 튜체프는 학업을 마치자 뮌헨에 있는 러시아 공관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러시아를 떠난다.

유럽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뮌헨에서 튜체프는 소신 있는 외교관이자 문학 애호가로 알려지면서 사교계의 주요 인물이 된다. 이때 그는 셸링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게 되면서 독일 낭만주의와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하이네와는 절친한 친구였다. 튜체프는 하이네의 시를 러시아어로 번역한 최초의 시인이기도 하다. 하이네 외에 실러와 괴테의 시를 러시아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한편, 이 당시 튜체프가 쓴 자작시들은 [망원경], [북방의 선율]이라는 러시아 잡지에 종종 실리기도 했다.

1826년 튜체프는 페테르손(E. Peterson)과 첫 번째 결혼을 했다. 결혼 후에도 튜체프는 다른 여자와 몇 번의 로맨스를 가짐으로써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는데, 그중 데른베르크(E. Dernberg)와의 로맨스는 크게 물의를 일으켜 결국 뮌헨에서 토리노로 좌천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튜체프는 1838년 첫 번째 아내가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배의 침몰로 인해 사망하자 데른베르크와 재혼하고자 했다. 이때 튜체프는 근무지를 무단이탈해 스위스로 갔고, 그 결과 외교관으로서의 자격마저 박탈되기도 했다.

그 이후 몇 년간 독일에 머물러 있던 튜체프는 1844년 러시아로 귀환했다. 그리고 1843년부터 러시아와 서구에 대한 저술에 전념했다. 그 저술에서 튜체프는 러시아와 동유럽의 연합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했고,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전 슬라브 민족의 통합을 주장했다. 이러한 정치적 견해는 니콜라이 1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황제는 튜체프를 다시 관직에 복귀시켰다. 1848년 튜체프는 페테르부르크 외무부에 특채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서적 검열을 총괄하는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튜체프는 곧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거물급 인사가 되었다. 그의 재치 있는 입담과 박식함, 노련한 대화술 등은 많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 그의 시 역시 새롭게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850년 [현대인]에 튜체프의 시는 다시 게재되었다. 이와 더불어 네크라소프(Н. Некрасов)의 비평도 실렸다. 네크라소프는 자신의 비평에서 튜체프를 푸시킨과 레르몬토프에 견줄 만한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했다. 이후 투르게네프(И. Турге_нев)의 주선으로 튜체프의 시집이 발간되었다. 당대의 많은 시인들 역시 튜체프를 러시아 최고 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1850년은 튜체프의 일생에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난 해다. 이때 그는 거의 딸과 비슷한 나이인 데니시예바(E. Денисьева)를 만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데니시예바와의 사랑은 사교계의 큰 가십거리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데니시예바는 자신의 가문에서 축출되기까지 했다. 데니시예바는 세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녀는 튜체프를 사랑하는 대가를 처절하게 치러야 했으며, 1864년 짧았던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인은 폐렴이었다.

데니시예바가 죽고 난 후 튜체프는 깊은 죄의식 속에 살았으며, 데니시예바를 향한 그리움과 죄의식을 시로 풀어냈다. 러시아에 머물 수 없어서 1년간 외국에 머물기도 했다. 방황을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또 다른 슬픔을 경험해야 했다. 데니시예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명의 아이가 죽었고, 어머니와 유일한 동생이 연이어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때의 심정은 「오랫동안 나와 함께한 아우에게… (Брат, столько лет сопутствовавший мне...)」(1870)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시에서 튜체프는 이미 자신의 삶도 거의 끝났음을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3년 후, 1873년 6월에 사망했다.
그림 :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 (Илья? Ефи?мович Ре?пин)
세계적인 문호 레오 톨스토이와 더불어 러시아 국민들이 국보로 생각하는 19세기말 러시아 최고의 리얼리즘 화가. 그는 우크라이나 하리코프 주 추구예프 시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부나코프라는 성상화가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863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하여서 일 년 동안 미술 공부를 한 후 1864년에 황립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입학 후 5년 뒤인 1871년 〈야이로의 딸의 부활〉로 아카데미 콩쿠르에서... 세계적인 문호 레오 톨스토이와 더불어 러시아 국민들이 국보로 생각하는 19세기말 러시아 최고의 리얼리즘 화가. 그는 우크라이나 하리코프 주 추구예프 시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부나코프라는 성상화가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863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하여서 일 년 동안 미술 공부를 한 후 1864년에 황립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입학 후 5년 뒤인 1871년 〈야이로의 딸의 부활〉로 아카데미 콩쿠르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면서 장학금을 받고 이 돈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면서 유럽의 예술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그는 귀국한 후에는 러시아의 역사적 사건을 묘사하는데 관심을 갖고 활동을 했으며, 수많은 동시대인들의 초상화들을 그렸다.

대표작으로는 〈볼가 강의 뱃사람들〉, 〈쿠르스크 지방의 십자가 행렬〉, 〈터키 술탄에게 편지를 쓰는 자포로쥐에 카자크들〉, 〈황녀 소피야〉, 〈이반 뇌제, 자신의 아들을 죽이다〉, 〈무소르그스키의 초상〉, 등이 있다. 러시아 회화의 거장 일리야 레핀의 글은 『일리야 레핀』이란 책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림 : 카를 파블로비치 브률로프 (Карл Па?влович Брюлло?в)
러시아의 화가. 친구들로 부터 '위대함 카를'이라고 불리었다.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러시아 최초의 화가로, 러시아의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에 걸친 과도기의 주요 인물로 되어 있다. 러시아의 화가. 친구들로 부터 '위대함 카를'이라고 불리었다.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러시아 최초의 화가로, 러시아의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에 걸친 과도기의 주요 인물로 되어 있다.
그림 : 이반 콘스탄티노비치 아이바좁스키 (Ivan Konstantinovich Aivazovsky,Aivazian, Иван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Айвазовский)
아르메니아인계 러시아인 화가로, 크림 반도에서 생활하였고, 화가로 일하였다. 그는 그의 작품중의 절반이상을 바다 경치로 구성하였고, 그의 바다 그림은 최고로 유명하다. 러시아 제국 의 크림 반도에 있는, 페오도시야의 마을에서 가난한 아르메니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의 성씨는 아이바지안(Aivazian)이다. 이 미술가의 작품들중 몇가지는 아르메니아 문자로 서명 되어있다. 그 서명은 "호브한네스 아이... 아르메니아인계 러시아인 화가로, 크림 반도에서 생활하였고, 화가로 일하였다. 그는 그의 작품중의 절반이상을 바다 경치로 구성하였고, 그의 바다 그림은 최고로 유명하다.

러시아 제국 의 크림 반도에 있는, 페오도시야의 마을에서 가난한 아르메니아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의 성씨는 아이바지안(Aivazian)이다. 이 미술가의 작품들중 몇가지는 아르메니아 문자로 서명 되어있다. 그 서명은 "호브한네스 아이바지안" (아르메니아어: ????????? ????????)이다. 미술가로써의 그의 재능은 그가 후원금을 벌게 해주었고, 제 1심페로폴 김나지움에 입학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가 유럽 전역을 여행하기 전인 그의 인생 전반기에는 그의 풍경화와 바다 그림마다 수상작 되면서, 그는 해안 마을의 크림 반도인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 후반기에, 해군 장면을 그린 그의 작품들은 러시아 해군으로부터 오랫동안 지속되는 직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1845년 술탄 압둘마지드의 초대에 응해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그는 1845~1950년에 8번을 콘스탄티노플 도시를 여행하였다. 아이바좁스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긴 체류 기간 동안에, 몇 점의 그림들을 그리기 위하여 오스만 술탄 압둘마지드와 압둘아지즈, 압둘하지즈에 의해 황실 화가로 임명되었다. 그의 작품들 중에 30 점은 현재는 오스만 제국의 궁전과, 터키의 돌마바흐체 박물관과 다른 많은 박물관들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시 미술관과 우크라이나 페오도시야에 있는 아비바조브스키의 미술 작품 전시관을 포함하여, 러시아와 과거 소비에트 연방 전역의 박물관들에서도 수십점이 발견된다. 터키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압둘라 귈의 장관실 벽에는 아이바 조브스키의 그림들이 걸려있다. 31세 때, 영국인 가정교사 줄리아 그레이브스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했다. 그들은 네명의 딸을 두었다. 그들의 결혼생활이 끝나고, 65세 때 페오도시야의 젊은 아르메니아인 과부 안나 부나지언과 재혼했다.

1985년, 소아시아의 아르메니안들의 하미디안 대학살에 의해 짙은 영향을 받아, 몇몇 작품들은 "터키 함선의 축출", "트라브존에서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과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플에 있을 때, 그에세 모든 메달들의 수여를 거절하였다. 그는 그의 인생후반기를 페오도시야에서 보냈다. 그는 데오도시아에서 그의 사유지로 부터 마을에 불을 공급했으며, 예술 학교를 열었다. 그는 그 지역에서 첫 고고학적 유적 발굴을 시작했고, 역사 박물관을 건축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페오도시아에는 무역 항구가 건설되었고, 철도 기차역 네트워크가 연결되었다. 1900년 사망하였다.
그림 : 바실리 푸키레프 (Vasili Vladimirovich Pukirev)
러시아의 풍속화가. 1832년 툴라(Tula)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정확한 출생지와 출생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농민 가정에서 자랐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리기 시작했고, 초등교육을 받은 후 모길레프 현의 무명 화가 도제로 들어 갔다. 그 후 우연한 기회로 모스크바회화조각건축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자랸코 교수 밑에서 회화를 배우며 탁월한 재능을 나타내서 1853년 예술아카데미에 보내졌다. 1860년 초상화 작품으... 러시아의 풍속화가. 1832년 툴라(Tula)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정확한 출생지와 출생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농민 가정에서 자랐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리기 시작했고, 초등교육을 받은 후 모길레프 현의 무명 화가 도제로 들어 갔다. 그 후 우연한 기회로 모스크바회화조각건축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자랸코 교수 밑에서 회화를 배우며 탁월한 재능을 나타내서 1853년 예술아카데미에 보내졌다. 1860년 초상화 작품으로 아카데미 회원 칭호가 수여되었다. 1861년~1873년 모스크바 회화조작건축학교에서 교사를 했지만 말년의 작품들도 〈어울리지 않는 결혼〉(1863년)과 같은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림 : 류보프 세르게예프나 포포바 (Lyubov Popova,Любовь Сергеевна Попова)
러시아 아방가르드, 러시아 구성주의를 대표하는 미술가이자 화가이다. 모스크바 현에서 태어나 모스크바에서 묻혔다. 색채와 포름이 조화를 이룬 균형 잡힌 구성주의적 회화를 많이 남겼다. 1920년대에는 직물, 염색, 무대장식(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 작품 「당당한 코퀴」(1922년) 외), 의상, 가구 디자인 등 넓은 분야에서 활약했다. 브후테마스 등에서 후진 교육에도 참가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러시아 구성주의를 대표하는 미술가이자 화가이다. 모스크바 현에서 태어나 모스크바에서 묻혔다. 색채와 포름이 조화를 이룬 균형 잡힌 구성주의적 회화를 많이 남겼다. 1920년대에는 직물, 염색, 무대장식(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 작품 「당당한 코퀴」(1922년) 외), 의상, 가구 디자인 등 넓은 분야에서 활약했다. 브후테마스 등에서 후진 교육에도 참가했다.
그림 : 이반 니콜라예비치 크람스코이 (Иван Николаевич Крамской)
러시아의 화가이다. 그는 1860년대부터 1880년대 사이에 러시아 미술을 이끌었던 이동파의 수장으로서 일리야 레핀 등 많은 예술가들을 이끌었다. 러시아의 화가이다. 그는 1860년대부터 1880년대 사이에 러시아 미술을 이끌었던 이동파의 수장으로서 일리야 레핀 등 많은 예술가들을 이끌었다.
러시아 낭만주의 화가. 농노 출신으로 자유롭지 못했으나 지주의 허가를 받고 뻬쩨르 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 정규 미술 교육을 받았다. 이때 트로피닌의 천재적 재능이 빛을 발해 180년 미술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예카테리나 2세의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트로피닌의 급성장을 두려워한 주인은 졸업도 하지 않은 그를 고향으로 불러 들이고 미술교육을 중단시켰다. 주위 지인들의 끊임없는 부탁으로 44세가 되어 신분 해방... 러시아 낭만주의 화가. 농노 출신으로 자유롭지 못했으나 지주의 허가를 받고 뻬쩨르 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 정규 미술 교육을 받았다. 이때 트로피닌의 천재적 재능이 빛을 발해 180년 미술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예카테리나 2세의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트로피닌의 급성장을 두려워한 주인은 졸업도 하지 않은 그를 고향으로 불러 들이고 미술교육을 중단시켰다. 주위 지인들의 끊임없는 부탁으로 44세가 되어 신분 해방이 이뤄지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가는 인고의 세월을 보냈겠으나 농민으로 보낸 시간들이 그림에 깊이 배어있다. 농노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따뜻한 배려가 예술로 승화되어 있다. 노동하는 민중, 농노에게도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인간으로서 삶이 있음을 여러 그림들을 통해 세밀하게 표현한다.
그림 : 니콜라스 레리히 (Nikolai Konstantinovich Rerikh,Nicholas Roerich)
러시아의 화가, 작가, 고고학자, 신지 학자, 철학자이자 러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 사상 지도자. 러시아의 화가, 작가, 고고학자, 신지 학자, 철학자이자 러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 사상 지도자.
그림 : 이삭 레비탄 (Isaac Ilyich Levitan)
"분위기"의 장르를 발전시킨 러시아의 고전적인 화가. "분위기"의 장르를 발전시킨 러시아의 고전적인 화가.
그림 :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베레샤긴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Верещагин)
러시아 제국의 가장 유명한 전쟁 화가로 해외에 널리 알려진 최초의 러시아 화가.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 정복과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종군하여 전장을 테마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러일 전쟁에서 취재를 위해 타고 있던 러시아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가 침몰하면서 사망했다. 그의 사실주의 화풍으로 인해 많은 작품들이 출판되거나 인쇄나 전시가 금지되었다. 러시아 제국 노브고로드주 체레포베츠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 러시아 제국의 가장 유명한 전쟁 화가로 해외에 널리 알려진 최초의 러시아 화가. 러시아 제국의 중앙아시아 정복과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종군하여 전장을 테마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러일 전쟁에서 취재를 위해 타고 있던 러시아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가 침몰하면서 사망했다. 그의 사실주의 화풍으로 인해 많은 작품들이 출판되거나 인쇄나 전시가 금지되었다.

러시아 제국 노브고로드주 체레포베츠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 때 부모의 희망에 따라 군에서 운영하는 유년학교에 들어갔다. 185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858년에 프리깃함 ‘캄차카’를 타고 서유럽과 이집트를 방문했다. 1859년에 장교가 되지만, 군을 제대하고 이듬해부터 페테르부르크 미술 학교에서 배운다. 우수한 성적이었지만 지루한 수업 방식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3학년 때 퇴학을 한다. 트빌리시에서 장기간 체류한 뒤, 프랑스로 건너 가 피레네 산맥 등을 찾아 파리에서 1년을 보냈다. 파리에서 에콜 데 보자르에서 배웠고, 장레옹 제롬에게 사사한다. 화가로서 그는 프랑스 파에 속하는 정밀한 묘사, 날카로운 조형, 그리고 부드럽고 밝은 다채로운 색상 조합을 특징으로 했다.

1867년, 콘스탄틴 폰 카우프만 장군과 함께 투르키스탄 원정에 종군하여 사마르칸트 공격 등을 목격한다. 1868년 카우프만 장군의 후원으로 투르키스탄을 주제로 개인전을 개최했다. 1870년 뮌헨에 머물면서 종군을 하는 동안 그려 모은 스케치와 연구를 그림으로 완성시키는 작업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관심사는 전투 장면보다는 오히려 중앙아시아의 이국적인 건축과 풍속이었다. 1874년에는 인도를 오랫동안 여행을 하고 영국에 식민지 지배를 받는 인도의 실태를 보고 듣는다.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에 종군하여, 사령관의 조치로 부관의 지위와 군 내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권리를 부여받고 시푸카 고개 전투를 목격한다. 플레벤 공략전에서는 군인으로 복무한 그의 형제가 죽고, 자신도 중상을 당한다. 이 비참한 전투는 그의 세계관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는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의 비참함을 현지에서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그림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전쟁을 그린 그의 그림에는 사망자, 부상자, 약탈, 야전병원, 눈에 덮힌 병사의 시신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테마는 평소 그림이나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의 민주주의 사상은 이동파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영웅 예찬이었던 전쟁 회화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이었다. 연속작이 많아 투르키스탄 원정 (1871년 ~ 1874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1877년 ~ 1878년, 1880년 이후), 러시아 원정을 테마로 그린 것이 있는데, 특히 후자에서는 보로디노 전투를 그린 대표작 ‘보로디노의 나폴레옹’이 탄생했다. 그의 그림은 그 주제로 인해 선전 선동(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이용될 수도 있었다. 다른 대표작 ‘전쟁의 결말’은 두개골의 산을 그린 것이지만 1980년에 출판된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해 쓰여진 책 표지에 ‘1916년 서부 아르메니아에서 터키에 의한 잔학 행위’라는 캡션을 달아 게재된 후에 베레샤긴의 작품으로 판명되었다.

188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비엔나와 베를린 등 긴 여행을 떠난다. 온천에 체류 중인 바트엠스는 성 알렉 교회의 제단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렸다. 1884년에는 두 번째 인도 여행을 떠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도 발길을 뻗었다.

팔레스타인 성지를 방문한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일련의 작품으로, 지금까지의 서구의 유럽화된 그리스도 상이 아니라 현지에서 실제로 보고, 들은 풍속과 풍경을 그려 넣은 자연주의적 기법을 이용하여 그리스도를 중동의 인간상으로 묘사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단 정교회의 아이콘은 서구의 회화와는 달리 원래 중동의 인간으로서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다).

그의 발길은 고향 러시아, 동유럽은 물론, 심지어 미국까지 가게 된다. 미국에서 미국-스페인 전쟁의 전장이 되었던 쿠바, 필리핀을 방문한다. 또한 1903년에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의 문화와 역사에 친숙 인물상 등을 남겼다.

1904년에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러시아 조차지 뤼순으로 갔다. 여기에서도 종군한 그는 여순 함대 사령관 스테판 마카로프에 초대를 받아 기함인 〈페트로파블롭스크〉에 탑승하여, 전쟁의 풍경을 그렸다. 그러나 4월 13일 페트로파블롭스크가 일본군이 부설한 기뢰에 닿아 폭발하였고, 불과 몇 분 만에 화약고가 폭발했기 때문에 마카로프 제독과 베레샤긴을 비롯한 승무원 대부분이 전사했다. 베레샤긴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던 마카로프의 회의의 모습을 그린 스케치가 파도에 떠다니다 무사히 회수되었다.

그의 죽음은 적국 일본에서도 보도되어 사회주의자였던 고토쿠 슈스이와 나카자토 카이자 등이 추모의 글을 남겼다.
그림 :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 (Alexej Georgewitsch von Jawlensky(Yavlensky))
독일에서 활동한 러시아 표현주의 화가. 뮌헨 신미술가협회(NKVM), 청기사파, 청색 4인조 등에 참여하였다. 원시적이고 대담한 색채와 단순한 형태를 특징으로 하며 얼굴을 주제로 한 특유의 신비감과 명상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러시아 귀족 출신의 야블렌스키는 1864년 토르조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황실경위대의 장교로 활동했지만 그림에 대한 열망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지원해 가서 사실주의 화가 일리아 레핀(I... 독일에서 활동한 러시아 표현주의 화가. 뮌헨 신미술가협회(NKVM), 청기사파, 청색 4인조 등에 참여하였다. 원시적이고 대담한 색채와 단순한 형태를 특징으로 하며 얼굴을 주제로 한 특유의 신비감과 명상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러시아 귀족 출신의 야블렌스키는 1864년 토르조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황실경위대의 장교로 활동했지만 그림에 대한 열망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지원해 가서 사실주의 화가 일리아 레핀(Ilja Repin)의 사사를 받았다. 또한 그곳의 미술학교에 등록하고 장교로서의 군생활과 그림 공부를 병행했다.

1896년 화가의 길을 걷기 위해 러시아를 떠나 뮌헨으로 향했다. 그의 곁에는 레핀의 화실에서 만난 마리안느 폰 베레프킨(Marianne von Werefkin)이 함께 했다. 베레프킨은 러시아 고급관리의 딸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후에 그의 아내가 되었다. 뮌헨 미술학교에 입학한 야블렌스키는 그곳에서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를 만나 일생동안 우정을 나눴다.

1905년 프랑스에서 마티스(Henri Matisse)와 함께 작업했으며 활기 넘치는 마티스의 색채에 큰 영향을 받았다. 독일로 돌아온 야블렌스키는 뮌헨을 중심으로 전개된 표현주의 운동에 깊게 관여했다. 특히 칸딘스키, 뮌터(Gabriele Munter), 베레프킨과 함께 한 무르나우에서의 제작 시기는 그의 예술에 있어 커다란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1909년 신미술가협회(NKVM)를 결성했고, 1912년에는 이 그룹에서 분리된 청기사파(Blue Rider Group)에 합류했다. 그러나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청기사파는 자연 해산되었다.

전쟁의 발발은 그의 작업에 중요한 전환이 되었다. 이 시기 야블렌스키는 풍경을 주제로 한 〈변주곡 Variation〉 연작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그의 방 창문을 통해 바라 본 경관을 여러 가지로 변용시킨 그림들로 차분하면서 명상적인 분위기를 나타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17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반추상의 얼굴 그림에서 더욱 강하게 비춰졌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밤의 응시 Looking within Night〉 (1923)와 같은 정면상 그림에 극도의 신비감을 부여했는데 이로 인해 러시아 정교회의 성상 그림에 비견되고 있다.

1924년 야블렌스키는 칸딘스키와 클레(Paul Klee), 파이닝거(Lyonel Feininger)와 함께 청기사파의 뒤를 이은 ‘청색 4인조(Blue Four)’를 만들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관절염으로 인한 마비증세로 시달리다 1941년 생을 마감했다.

야블렌스키는 대담한 색채와 표현적인 형태를 사용하고 있지만 인물의 보편적이고도 신비로운 특성에 관심을 갖았다. 또한 초상화와 풍경을 통해 특유의 명상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주요 작품에는 〈스페인 여인 Spanish Woman〉 (1913), 〈알렉산더 사카로프의 초상 Portrait of Alexander Sacharoff〉 (1913), 〈얼굴: 붉은 빛 Head: Red Light〉 (192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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