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Review MDCCLIX / 21세기북스 23번째 리뷰] 나는 예술을 쥐뿔도 모른다. 마치 입에 달아야 삼키고 쓰면 뱉는 것처럼 '내 눈'에 아름다워야 아름답게 보이고, '내 귀'가 즐거워야 좋은 음악이라고 평하는 아마추어 중에 쌩~아마추어다. 그런 내가 '음악철학'에 관한 책을 손에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미학]이란 이런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반에 반쯤 이해할까 말까 그랬다. 그런데 음악이 멈춰야 '진짜 음악'이 시작된다는 제목을 완독한 뒤에 다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학창시절에는 따분하기만 한 '교과서'가 왜 좋은 줄 몰랐다가, 제자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보니 '교과서'만큼 좋은 책이 없다는 느낌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처럼 '좋은 음악'일수록 피날레를 장식한 뒤에 청중들의 환호와 박수 갈채가 쏟아지고, 그 환호와 갈채도 잦아들고 텅빈 객석에 앉아 홀로 남겨지고 나서야 '긴 여운'으로 감동이 밀려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음악철학'은 들리지 않는 음악을 들으며 머리로 생각하는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해서 논하는 학문이란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그럼 '음악철학'이란 무엇일까?
무술에 '음공(音功)이란 것이 있다. 영화 <쿵푸허슬>에서 장님악사가 반가부좌를 하고서 내공을 모아 거문고를 튕기니 소리가 창칼이 되어 상대의 목숨을 앗아가는 등 치명상을 입히는 무서운 무공이었다. 이때 '무형'의 음공에 맞서 '유형'의 무기를 든 무술고수는 하나같이 목숨을 잃고 말았는데, '무형'의 음공에 맞서 '무형'의 사자후를 토해내니 '내공의 차이'만큼 혼쭐이 나고선 부리나케 도망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무형'의 것을 '유형'의 무엇으로 표현해서 '무형의 가치'를 새롭게 창출해내는 것이 '음악철학'이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아닌 게 아니라, 좋은 음악은 들은 뒤에 '무언가'를 분명히 느낀다. 그것을 무어라 콕 집어서 표현할 깜냥이 부족하기에 이렇게 표현해보았다. 사실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가 '대위법'으로 음악을 한 단계 끌어올렸고, 음악의 천재 베토벤이 '불멸의 교향곡'을 만들어내며 음악의 정점을 찍었다는 식의 설명은 들어도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음악을 들으면 '감정'이 느껴진다는 이 책의 첫 소절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음악의 이 소절에서는 '기쁨'이 느껴지고, 저 소절에서는 '설렘'이 느껴지며,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는 '환희'가 느껴지면서, 음악의 전체적인 주제는 '첫사랑'이었다는 식으로 이해를 하려니 음악이 쉽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음악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사로잡기 시작한 음악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음의 대화'를 시도하게 되었다는 점도 신기했다. 마침맞게 하지은의 소설 <얼음나무 숲>에서 음악 신동 아나토제 바엘이 자신이 켜는 바이올린으로 청중들과 '음의 대화'를 시도했다는 소재를 접했기에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음의 대화'를 시도한들 '인간의 언어'처럼 명확하고 객관적인 전달은 할 수가 없었단다. 왜냐면 '소리'는 듣는 사람의 '경험'과 '사상(생각)'에 따라 주관적인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쁨'과 '슬픔'처럼 단편적인 의미(감정)은 전달할 수 있을지언정 '분에 넘치는 기쁨'이나 '달콤한 슬픔' 같은 복잡한 언어의 기능을 단지 '음악'으로만 표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사실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표제음악'으로 점참 발달했단다. 다름 아니라 '제목'이 없던 악보에 '제목'을 붙여서 음악의 전체적인 주제가 잘 드러나게 표현한 것이다. 예를 들어,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적 변화'를 보다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청중들이 '제목'을 먼저 들었기에 더욱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고, 미처 '제목'을 알지 못했더라도 봄에 꽃이 피고, 가을에 낙엽이 지며, 여름에 활기찬 기운과 겨울에 쓸씀한 감정을 어렴풋이 느꼈다가 '제목'을 듣는 순간, 무릎을 탁 치며 옳다고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슈베르트의 <송어>도 물고기가 헤엄치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소리'로 표현해내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음악에서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음악은 우리의 삶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진리를 탐구하듯 세상의 본질을 '음악적으로 구현'하려드는 경향을 선보이게 되었고, 더 나아가 '진보적인 음악'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그려나가는 등 음악이 표현하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다양하게 연주되기 시작했단다. 책의 내용이 '걸음마'를 시작한 뒤에 곧바로 '하늘을 나는 듯'한 심한 비약을 담고 있다고 오해할 정도로 '축약'해버리고 말았지만, 내 음악적 소양이 이 정도밖에 되지 못해 더는 표현할 길이 없다는 점을 감안해주었으면 좋겠다. 쉽게 말해보자면,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며, 그렇기에 '사회비판적인 메시지'조차 음악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니체나 쇼펜하우어처럼 음악을 철학적으로 승화시켰고, BTS는 <봄날>을 발표하며 '세월호'에 대한 마음을 리얼리즘 예술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80년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발표한 <사계>처럼 당시의 사회상을 음악이 얼마든지 반영할 수 있고,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는 가사처럼 엄혹한 사회속에서 민중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는지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책의 마무리는 'AI 작곡'과 '크로스오버(이질적인 장르가 서로 합해져서 만들어진 음악)'으로 주제를 열어내며 '음악적 표현에 한계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간이 만든 음악보다 더 훌륭한 음악을 만든 '인공지능(AI)'의 등장은 향후 음악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아니 그 음악을 '창작'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라는 원론적인 비판부터, AI가 만든 음악이 너무 듣기 좋은데도 절대로 들으면 안 되는 것인가? 만약 들어도 된다면, '음원 수익'은 누가 가져야 하는가? 그렇게 '3분 창작'으로 수익을 내는 시장이 형성된다면, 과연 누가 힘들게 '고된 창작 예술'에 뛰어들겠는가? 그렇다면 '모방'밖에 할 줄 모르는 AI 작곡 때문에 음악은 쇠퇴하게 될 것이라는 끔찍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한편, 대표적 '크로스오버'의 예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를 선보였다. 동양과 서양을 한데 어우어지게 만든 <범 내려온다>는 요즘 말로 너무나도 '힙하다'. 이른바 전통 판소리에 팝음악을 접목시켜, 앰비규어스댄스 팀의 파격적인 춤까지 합치게 되니, 그 '시너지 효과'는 엄청났다는 것이다. 전통과 현대가 한데 어울어지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면서, 이른바 'K-흥'이 전세계적으로 통한다는 것도 실감하였다. 이는 전통이라는 '익숙함'에 현대가 주목하는 '신선함'을 접목한 순간이기도 하다. 이처럼 '익숙한데 새로운 것'은 앞으로 음악이 나아갈 길이라는 말로 끝맺음을 하였다.
예술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조금이라도 낡은 것은 쉬이 도태되고, 대중을 사로잡지 못한 진부함은 외면받기 일쑤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말이다. 그런 예술에 '철학'까지 담으려한 이 책이 주는 신선함은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물론 '음악철학(미학)'이 새로운 장르는 아니란다. 서양음악 쪽에선 아주 오래전서부터 시도되었고, 한국 음악계에서는 19세기 말 서양음악을 받아들이면서 '사실상' 시작된 셈이다. 한국 음악이 '동양적 철학사상'에 '서양적 철학사상'까지 합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21세기 지금, 전세계는 'BTS'와 '이날치' 등 한국음악에 심취하고 있다. 그렇게 다시 '한국음악'이 서양음악계에 '크로스오버' 되면서 더욱 다양한 시도를 선보일 것이 틀림없다. 학문이 이렇듯 '쉼'없이 새로움을 추구한다니, 익히 알고 있었으나 새삼 '음악, 또한 그렇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살짝 심취할 수 있었다. 물론 내 귀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음악이 멈춘 다음 '글'로써나마 음악철학의 지평을 넓혀 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