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겨울전쟁(1939년 11월 30일~1940년 3월 13일)에서 승리한 소련은 그 후에도 끊임없이 핀란드를 괴롭혔다. 독소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독일은 소련에 반감을 품고있는 핀란드에 대량의 무기 지원을 약속하며 주축 동맹군으로 끌어 들인다. 이로써 겨울전쟁의 영웅 만네르 하임 원수의 지휘하에 핀란드군은 1941년 6월 22일 독일 바바롯사 작전으로 독소 전쟁에 참여 함에 따라 6월 26일 소련을 공격한다.
탈리 이한탈라 전투-(1944. 6.25~7월 9일)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핀린드- 소련의 계속 전쟁 (1941년 6월 25일~ 1944년 9월 19일)의 후반. 대대적인 소련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핀란드군이 승리한 전투.
탈리 이한탈라 전투에서 소련군은 약 300여대의 전차, 약 120~280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18,000~22,000명의 병력이 부상 또는 전사하였다. 반면 핀란드군은 8,561명이 부상 실종, 또는 전사하였다. 하지만 소련군의 사상자 현황은 축소된 것이라 한다.
1944년, 3년 가까이 고통속에 신음하던 혁명의 도시 레닌그라드의 포위를 분쇄한 붉은 군대는이웃의 작지만 성가신 핀란드와의 질긴 악연을 끝내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6월 9일, 소련은 연합군의 노르망디상륙에 맞춰 칼레리안 지협에 대해 3개 군을 동원한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26만여명의 병력과 1000여대의 항공기, 7500문이상의 화포와 600여대의 기갑차량이 동원된 이 공세앞에 하루만인 6월 10일, 핀란드군은 1차방위선인 발케사리섬을 포기해야 했고 바멜스와 타메팔리에 제2의 방어선을 구축했다.(V-T라인)
하지만 그마저도 6월 14일, 붉은 군대는 사하킬라와 쿠터셀카를 점령하면서 돌당파했다. 핀란드군은 기갑사단을 동원해 쿠터셀카를 수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핀란드군은 기존의 V-T라인을 포기하고 바이푸리-쿠파르사리-타이팔레로 이어지는 3차방위선을 구축했다. (V-K-T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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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3년 가까이 고통속에 신음하던 혁명의 도시 레닌그라드의 포위를 분쇄한 붉은 군대는이웃의 작지만 성가신 핀란드와의 질긴 악연을 끝내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6월 9일, 소련은 연합군의 노르망디상륙에 맞춰 칼레리안 지협에 대해 3개 군을 동원한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26만여명의 병력과 1000여대의 항공기, 7500문이상의 화포와 600여대의 기갑차량이 동원된 이 공세앞에 하루만인 6월 10일, 핀란드군은 1차방위선인 발케사리섬을 포기해야 했고 바멜스와 타메팔리에 제2의 방어선을 구축했다.(V-T라인)
하지만 그마저도 6월 14일, 붉은 군대는 사하킬라와 쿠터셀카를 점령하면서 돌당파했다. 핀란드군은 기갑사단을 동원해 쿠터셀카를 수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핀란드군은 기존의 V-T라인을 포기하고 바이푸리-쿠파르사리-타이팔레로 이어지는 3차방위선을 구축했다. (V-K-T라인)
핀란드군의 전황은 날이갈수록 심각해졌다. V-T라인을 포기한지 불과 1주일도 지나지 않은 6월 20일, 붉은 군대는 짧은 교전 끝에 바이푸리마저 점령했다. V-K-T라인마저 포기해야될 상황에 몰린 것이다. 핀란드는 다시 후퇴해서 방어선을 재구성하든지, 아니면 기존의 V-K-T라인을 사수할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더이상 후퇴는 없다!"
만네르하임은 기존 V-K-T라인의 사수를 택했다. 6월 12일, 핀란드는 동맹국인 독일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독일은 핀란드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고 쿠루트 쿨메이가 이끄는 루프트 바페 비행대와 303돌격포여단과 122사단, 그리고 대량의 판저 파우스트를 보냈다. 소련군의 공세규모를 생각할때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지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303돌격포여단은 말이 여단이 대대급병력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독일도 그이상 지원할 역량이 없었다. 동부와 서부, 모든 전선에서 연합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고 있었기에 그걸 막는것만으로도 힘이 부치고 있었다. ------
1944년, 3년 가까이 고통속에 신음하던 혁명의 도시 레닌그라드의 포위를 분쇄한 붉은 군대는이웃의 작지만 성가신 핀란드와의 질긴 악연을 끝내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6월 9일, 소련은 연합군의 노르망디상륙에 맞춰 칼레리안 지협에 대해 3개 군을 동원한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26만여명의 병력과 1000여대의 항공기, 7500문이상의 화포와 600여대의 기갑차량이 동원된 이 공세앞에 하루만인 6월 10일, 핀란드군은 1차방위선인 발케사리섬을 포기해야 했고 바멜스와 타메팔리에 제2의 방어선을 구축했다.(V-T라인)
하지만 그마저도 6월 14일, 붉은 군대는 사하킬라와 쿠터셀카를 점령하면서 돌당파했다. 핀란드군은 기갑사단을 동원해 쿠터셀카를 수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핀란드군은 기존의 V-T라인을 포기하고 바이푸리-쿠파르사리-타이팔레로 이어지는 3차방위선을 구축했다. (V-K-T라인)
핀란드군의 전황은 날이갈수록 심각해졌다. V-T라인을 포기한지 불과 1주일도 지나지 않은 6월 20일, 붉은 군대는 짧은 교전 끝에 바이푸리마저 점령했다. V-K-T라인마저 포기해야될 상황에 몰린 것이다. 핀란드는 다시 후퇴해서 방어선을 재구성하든지, 아니면 기존의 V-K-T라인을 사수할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더이상 후퇴는 없다!"
만네르하임은 기존 V-K-T라인의 사수를 택했다.
6월 12일, 핀란드는 동맹국인 독일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독일은 핀란드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고 쿠루트 쿨메이가 이끄는 루프트 바페 비행대와 303돌격포여단과 122사단, 그리고 대량의 판저 파우스트를 보냈다. 소련군의 공세규모를 생각할때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지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303돌격포여단은 말이 여단이 대대급병력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독일도 그이상 지원할 역량이 없었다. 동부와 서부, 모든 전선에서 연합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고 있었기에 그걸 막는것만으로도 힘이 부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판저 파우스트는 독일이 핀란드에게 보낸 최고의 지원이었다. ]
동맹국의 빈약한 지원과 압도적인 힘의 침공군. 핀란드는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핀란드는 소련에게 자비를 구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소련과 평화협상을 맺고 싶었지만 모스크바의 반응은 냉담했다.
"무조건 항복이외에는 그어떤 평화협상도 없다!"
평화협상이 결렬되었고 다음날 6월 22일, 리벤트로프가 핀란드 대통령 리스토 리티를 방문했다. 리벤트로프가 전한 히틀러의 메세지는 다음과 같았다.
"만약 핀란드가 독일의 군사지원을 계속받고 싶다면 소련과 계속 싸우시오."
리스토 대통령은 핀란드가 계속 독일과 함께 싸울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약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소련군은 바이푸리 남쪽에 자리잡은 '탈리'마을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소련군의 탈리 공격은 병력에서는 5만대 15만으로 3배이상 우위에 있었고, 포병전력에서는 핀란드가 268문의 화포를 동원한데 비해 소련은 그 20배가 넘는 화력을 투입했다.게다가 폭격기 400여대와 전투기 600여대라는 압도적인 항공전력도 동원했다.그리고 침공군에는 소련군의 정예라 할수 있는 제30근위군단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겨울전쟁때와는 비교도 되지않는 핀란드의 국운을 건 전투가 다시 한번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6월 20일, 소련군 제 97, 109군단과 152 전차여단이 탈리를 향해 진격해들어갔다. 방어하고 있던 핀란드군은 18사단과 3여단, 13연대 3대대였다. 부대 명칭에서 보면 짐작할수있겠지만 2차례에 걸친 방어선 붕괴로 되는 대로 급 조달한 부대였다. 재밌는건 13연대가 핀란드에 거주하는 스웨덴어사용자로 구성된 부대였던 탓에 일부 자료에서는 스웨덴정부가 직간접적으로 지원을 보냈다는 증거로도 언급된다.-하지만 이미 겨울전쟁때부터 의용군형식으로 스웨덴이나 기타 주변국인들이 참전하고 있었으니 무조건 그렇게 보기도 힘들다.
대충 이런 상황이다보니 소련군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방어선이 붕괴될것이라고 확신했다. 철저한 우위에 있는 화력과 공중지원, 그리고 병력. 탈리가 함락되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핀란드군은6월 24일, 증원 병력이 올때까지 버티는데 성공했다. 결국 소련군의 1차 탈리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6월 25일, 오전 6시30분. 소련군을 귀를 찢는 듯한 대규모 포격으로 아침을 열었다. 탈리 공격을 위해 준비한 수천여문의 야포들이 불을 뿜었다. 1시간뒤인 7시30분, 소련군은 다시 한번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6월 28일까지 탈리마을 후방으로의 돌파를 목표로 잡고 있었다. 이번 공세에는 제30근위군단이 새로 합류했다. 소련군은 레이티모야비호수의 양쪽끝을 돌파할 계획이었다. 호수의 동쪽끝의 소련군 핀란드4사단에 의해 서쪽보다 3Km가량 뒤져 있었다.서쪽의 45근위사단과 109군단의 보병들은 핀란드군 48연대가 방어중인 Konkkalanvuoret 언덕을 장악하기위해 공격을 퍼부었고 소련군 27전차연대는 방어선을 돌파해 포르틴호이카의 교차로에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소련군 178사단도 핀란드군 6연대가 방어중인 자르엘라 지협을 공격했지만 완강한 저항과 지형적 불리함으로 후퇴해야만했다. 그리고 그사이 97군단도 핀란드군 3여단 방어지역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지만 아주 불과 몇마일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이쯤에서 잠깐 돌아보면 핀란드군이 화력과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잘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붉은 군대는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핀란드군의 진영을 분단시키고 고립시키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친란드군이 조각조각나 각개격파당할것이 뻔했다. 겨울전쟁때 자신들에게 소련군에게 했던 방식처럼! 만네르하임으로서는 가장 두려운 일이었고, 탈리공격을 주도하던 소련군의 드미트리 N. 구세프 장군으로선 이전같은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라서 아쉽긴하지만 노리던 바였다.
"당장 증원군을 마련해서 투입하라!"
만네르하임은 예비전력들을 긁어모았다. 18사단의 예비대와 17사단의 일부와 4사단의 일부 가용병력이 긴급히 투입되었다. 오후가 지나자 핀란드는 기갑사단을 추가로 증파해 소련군을 뒤로 물리는데 성공했다. 가정 멀리 진출했던 소련군 27전차연대는 전멸하고 말았고 6대의 전차가 핀란드군에게 노획되었다.붉은 군대의 두번째 공격은 그렇게 실패했다.
순식간에 방어선이 또다시 분쇄당할 뻔한 핀란드군은 탈리 전역에 다시 병력을 투입했다. 각지에서 긁어모은 핀란드군병력이 증파되었고 독일군303 돌격포여단이 마침내 도착했다. 새로 증파된 핀란드군은 구멍난 모든 전선에 골고루 뿌려졌다. 그래봤자 그러 넓지 않은 지역이었기에 병력의 밀집도는 상당부분 유지될수있었다. 핀란드군이 버틸수 있었던 이유중에는 이런 지형적이점도 한몫했었다. 방어병력을 확충한 핀란드군은 브요크만과 푸로마라는 두개의 그룹으로 재편성되었다. 소련역시 병력을 충원했다. 지난번 30근위군단에 이어 108군단이 추가되었다.
이번에는 핀란드군이 먼저 공세에 나섰다. 그들은 아직도 레이모야비호수 동쪽에 진출해 있는데 소련군을 향해 공격에 나섰다. 핀란드군의 이들 붉은 군대를 세방향에서 공격을 가해 겨울전쟁때처럼 장작패서 괴멸 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핀란드군의 오판도 도를 넘어선 오판이었다. 붉은 군대는 겨울전쟁 당시의 붉은 군대가 아니었고 이지역 붉은 군대전력의 핵심은 근위사단들이었다!-46,63.64근위사단과 268사단, 30근위전차사단등. 결국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견고하게 필사적인 그리고 압도적인 화력의 지원을 받는 방어덕에 장작패기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핀란드군의 이공격의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투가 진행된 72시간동안 핀란드군 6사단과 11사단이 새로 전장에 배치되었다.
치열한것은 지상뿐만이 아니었다. 양측의 공중전도 치열했다. 소련군 276폭격비행대의 경우, 탈리전투동안 1300여회의 출격했다고 한다.
6월 28일 탈리 방어전을 책임지던 핀란드군의 칼 레난트 애쉬장군은 중요한 결단을 내린다.
"제군들, 지금까지 잘싸워주었다. 그러나 더이상 이곳에서 소련군을 막는것은 무리다.탈리를 포기한다."
확실히 핀란드군은 탈리를 사수하면서 군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벌수는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탈리에서 소련군을 막아낼수는 없었다. 다른 핀란드군들이 재전개되는 상황에 언제까지 탈리에 매달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6월 29일. 소련군은 다시한번 공세에 나섰다. 퇴각준비를 하던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대규모공세앞에 철저히 유린당했다. 핀란드군은 끔찍한 피해를 입으며 탈리를 사수했지만 이날 은핀란드군 사상 최악의 날로 기록되었다.
6월 30일. 핀란드군은 마침내 탈리에서 후퇴했다. 그들이 후퇴하는 와중에도 소련군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7월1일과 2일, 이틀동안 핀란드군은 평균 800명의 사망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핀란드군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한탈라에서 다시 한번 방어전을 준비했다.
7월 2일, 핀란드군은 이한탈라에 대한 공세를 준비하는 소련군의 통신을 감청했다. 7월 3일 오전 4시에소련군 63사단과 30기갑여단이 공격에 나설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결정적인 정보의 유출로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공세에 대비할수있었고, 다음날 오전 3시 58분. 소련군의 공세 예정시각 2분전에 40대의 핀란드와 독일의 폭격기들 공세를 준비하고 있던 소련군을 덮쳤다. 이어서 250여개의 핀란드군야포들과 4000여발의 포탄을 소련군에게 퍼부었다.
갑작스런 적의 역공세에 당황했지만 소련군은 이대로 물러설수 없었다. 같은 날 오전 6시, 소련군 폭격기 200여대가 공습에 나섰고, 지상군의 공격도 이어졌다. 그러나 이한탈라에서 방어전이 재개되었을때, 핀란드군은 탈리에서 시간을 끌었던 덕분에 꽤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진행할수있었다. 핀란드군은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야포의 절반을 이지역에 투입했고 독일군 303돌격포여단도 본격적인 전투에 나섯다. 그리고 독일이 보낸 기적의 난로연통 판저파우스트가 대량 지급되었다. 결국 오후7시, 핀란드는 이한탈라전역의 방어선을 완전히 회복했다.
구세프는 다시한번 공세를 명령했다. 그리고 이어진 공세에서 소련군은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7월 6일, 핀란드군 6사단 18포병대대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몇km를 추가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날 핀란드군은 붉은 군대를 퇴각시켰고, 소련군 오후 1시와 7시에 다시 공격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잊달은 공세의 실패는 모스크바를 실망시키기 충분했다. 7월 7일, 스타브카는 30근위군단을 에스토니아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독일진공작전에 투입할 정예병력을 핀란드에서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7월 9일이 되자, 소련군에 의한 방어선 돌파시도는 중단되었다.
탈리-이한탈라 전투는 그렇게 종결되었다.
이 전투에서 핀란드 군은 8,561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소련군은 1.5000에서 22,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것도 축소된 수치라는 주장도 있지만.
1944년 여름이 끝날 때 쯤이 되자, 핀란드군은 카렐리안 지협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이어 가을에는 양측의 평화협상이 진행되었고 핀란드 군은 탈리-이한틸라 전역의 결과로 무조건 항복은 피할수있었다. 1944년 9월 4일 오전 7시를 양측의 교전중지명령이 발효되었고 이어 19일에는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탈리-이한틸라전투에서 핀란드군이 소련군을 상대로 버틸 수 있었던 것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적으로 카렐리안 지협의 좁은 지형이 붉은 군대의 숫적 우위를 발휘하기에 충분치 못했으며, 6월초의 소련의 압도적 전황으로 인한 소련군의 오만과 그에 대한 오판, 그리고 비교적 빠른 진격에 보급선이 따라와 주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 였다.
거기에 수시로 뚫려버린 소련군의 통신체계로 소련군의 움직임이 핀란드군에게 노출되었으며, 핀란드군이 택한 게릴라전략도-후퇴대열에 합류못한 부대들은 그자리에 숨어있다가 아군공세가 시작되면 적을 후방에서 공격하라.-상당히 유효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핀란드군 포병대의 분투도 들 수 있겠다. 포병하면 소련인데 어디서 핀란드 포병따위가 나올 수 있겠냐는 지적도 가능하겠지만 빌호 페터 네노넨이 지도한 핀란드포병대는 전장을 지배는 붉은 군대의 포병대에 대비해 잘 싸워주었다. 그야말로 지축을 뒤흔드는 소련군 포병대와는 달리, 이들 핀란드포병대는 일선부대와 연계하여 빠르고 정확하게 포격을 가하는 방식을 택했고 이게 탈리-이한탈라 전역에서 '상당히'유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