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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4년 06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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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도서 제본방식 안내 |
쪽수, 무게, 크기 | 480쪽 | 738g | 153*224*38mm |
ISBN13 | 9788972977193 |
ISBN10 | 89729771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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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는 현명한 스님들의 물음 48가지를 모아 엮은 무문관을 강신주의 해석으로 풀어낸 책이다. 대부분 책 제목을 보면 책 제목에서 무슨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다상담』을 보면 삶에 관한 여러 가지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다' 하겠다는 뜻이겠거니 추측할 수 있다. 또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은 시인들의 시를 철학적 이론들과 연관지어 해석하겠구나 등으로 감을 잡는다. 그런데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이 책은 제목만으로는 도통 감을 잡기 힘들다. 매달려 있는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겠냐니, 마치 읽는 이를 시험하고 있는 것같이 꽤 도발적이다.
이 책에는 경전에 얽매이지 않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꾸짖다시피 던진 말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이 상당히 거칠다. 뺨을 치는 건 대수고, 손가락을 자르는 등 온화한 방식이 하나도 없다. 살생을 금하고 자비의 정신으로 깊은 산속 청명한 마음을 지니며 수행할 스님들의 이미지를 생각하였을 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마음마저 든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일체의 허영과 가식, 허례에서 벗어나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자들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꾸짖음은 모두 나 이외의 우상을 허물고 진정한 나 자신으로 서야한다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사실 성불, 부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스님들에게 일체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고자 스승을 모시려 하고,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을지 묻는 것이다.
알고자 하고 되고자 노력하는 이 스님들을 기특하게 여길 법도 하련만, 무문관에 등장하는 모든 스님들은 그러한 제자들의 뺨을 갈긴다. 그 반응에 당황하는 스님이 있는가하면, 그새 깨달음을 얻고 미리 선수를 쳐 스승의 뺨을 갈기는 스님도 있다. 더 이상한 점은, 그 뺨을 맞은 스승들이 제자를 대견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스승의 뺨을 친다, 그것에는 스승에게 권위를 부여하지 않고 스스로 서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긴 행동이었다. 그들에게 깨달음이란 나 이외의 다른 성인들이나 경전에 의존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주체적인 존재로 나아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인정욕구에 굶주려 있고, 진여의 측면보다 생멸에 훨씬 더 가까이 있어 매일 오락가락한 기분 상태로 살아가는 나에게 이 책은 하나의 도전이었으며 반성이었다. 나에게는 작가가 되고자 하는 꿈이 있는데 언제부턴가 나 스스로도 그 꿈에 대해 내가 잘못 접근하고 있다는 자각이 묘하게 일고 있었다. 그 첫 시작은 이승우 작가님의 책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고 있다』였다. '작가란 소설을 쓰다가 되는 것이라고', 그 물음 앞에 놓인 나는 그동안 빈 활자의 공포에 직면해가며 제대로 된 소설 하나 완성해보지 않았던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단 쓰자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되도 않는 글줄들을 늘어놔 보기도 했었다. 그 과정 속에서 얻게 된 깨달음은 나는 작가가 되는 것보다 작가가 되었을 때 주어지는 타인들의 시선이나 공명심에 집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꾸어왔던 그 꿈이야말로 일종의 백일몽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내 글줄에서 비어있음을 확인할 때마다 나는 글쓰기의 방법이나 다른 소설들의 권위에 기대려 하면서 나만의 것을 찾아낼 노력은 하지 않고 있었다. 무문관의 스님들이 보았다면 몽둥이 세례를 당하고도 남았을 일이다. 삶의 경험과 그 속에서 얻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말들은 거쳐 지나가는 과정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지 종착역이 되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샌가 그것을 잊고 지내왔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꿈과 그 꿈에 접근하던 나를 돌아보았고 그러던 중『소설과 소설가』의 작가 오르한 파묵이 떠올랐다. 23세의 나이로 작가가 되겠다는 그에게 주위 사람들은 '나이를 좀 먹고 인생과 사람들,세상을 경험해본 다음에 소설을 쓰라고' 만류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소설은 우리가 인생을, 사람을 알기 때문에 쓰는 게 아니에요. 다른 소설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써 보고 싶기 때문에 쓰는 거라고요!" (『소설과 소설가』, 오르한 파묵, 민음사, p.178)
만약 23세의 오르한 파묵이 그에게 소설 쓰기를 만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소설 쓰기를 그만두었더라면 지금의 거장 오르한 파묵은 없었을 수도 있다. 누군가 무언가 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주체로 거듭나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겨 나아가야만 그 결실을 맺을 수 있다. 그동안 나는 무문관의 스님들처럼, 오르한 파묵처럼 세상 앞에 온전한 자신으로 당당히 서 있지 못했다. 그러니 앞으로는 언제나 나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나 이외의 것에 지나친 권위를 부여하는 바람에 자신이 그 부속물로 편입되어 버리는 부차적인 삶은 걷지 않을 것이다.
이 밖에 이 책의 편집에 대해서 참 고마웠고 탁월했다 느낀 점은 저자의 에필로그 뒤에 무문관 원문을 옮겨 두었다는 것이었다. 내용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따라가고, 한편으로는 저자의 해석에 말려 나의 독자적인 해석이 있을 공간을 잃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그 사유의 깊이를 버겁게 쫓아가다 보니 어느새 원문의 깊이는 기억 저편에서 저만치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책 말미에 무문관 원문을 순차적으로 배열한 편집의 배려로, 나는 책이 주는 깨달음을 되새기며 그 뒤에 나의 해석을 작게나마 덧붙일 수 있었다.
사실 관련 주제를 배워본 적 없어 철학적 지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내가 책의 원문만 보고서 그 내용을 탐독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올해 초 『강신주의 감정 수업』을 읽고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어 보려 했다가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내려놓고 말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철학자가 놓아준 보조 계단 없이 나 혼자 스스로 원문의 높이에 맞서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한 문장 한 문장씩 나아가다 이해의 벽에 부딪힐 때 사유로 맞설 수 있는 정신적 여유도 요구된다. 지금 준비하는 일이 끝났을 때 다시 원문 읽기에 도전할 것이고, 그래야만 나는 비로소 무문관에 대한 나만의 길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지금 쓰는 리뷰가 내가 쓴 책 리뷰 중 가장 긴 듯 하다. 이만큼 쓰고도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것이 놀랍지만 그만큼 이 책이 내게 미친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겠지.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의아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강신주의 저서들을 통해서 이미 여러 번 부딪힌 적 있었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간 기독교 공동체 생활에서 여러 번 실패를 겪으면서 나는 교회에 대한 회의를 품은 적 있었으나 나의 신앙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에는 타당한 이유가 분명 존재한다. 먼저 저자는 초월 종교로서의 기독교에 대해 '만약 십자가를 두고 "녹슨 쇳덩어리!"라고 바쿠닌이 외쳤다면, 교회나 성당에서는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바쿠닌은 이단이나 사탄 취급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결코 이를 수 없는 절대적인 초월자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본 책, p.110)'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나는 기독교의 '십자가'에 대한 의미를 덧붙이고 싶다.
기독교에서는 우상 숭배를 금하고 있고, 이는 십계명에도 명시되어 있다. 성경에서 주로 우상 숭배 금지는 민간 신앙이나 토템 신앙처럼 돌을 섬기거나 하는 행위를 금하는 것이지만, 나는 이것이 강신주씨가 설명한 십자가에 대해서도 적용된다고 본다. 기독교도들이 십자가에게 신과 같은 권위를 부여하면서 누군가 그것을 '쇳덩어리'로 끌어내리는 것에 분개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들에게 우상 숭배의 죄가 있다고 생각하실 것이라는 거다.
기독교의 십자가란 단순히 그 형태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흘리신 보혈의 큰 사랑을 의미한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이 베푼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로서 재물에 대한 탐욕을 내려놓고 그것을 어려운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믿는 자 자신이 언제고 지니게 될 수도 있는 '십자가의 무게'를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강신주가 이 책에서 설명한 불교의 정신과 기독교의 정신은 닮아 있다.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 그리고 먼저 깨달은 자의 의무로 다른 사람들을 깨닫게 할 책임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로 구원의 길을 함께 걷게 할 의무 등이 그렇다. 비록 나는 불교의 경전이나 교리를 깨우치지 못했고, 성경조차도 1회독을 해본 적이 없지만 그러한 일체의 권위로부터 벗어나 나 스스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초월 종교의 모습이 비추어질 때 저자는 보다 관대한 입장으로 바라보는 반면, 기독교에 대해서는 인간을 절대 타락자로만 인식하여 인간의 자율성을 허용치 않는 종교로 부정적으로만 그려내는 점이 아쉬웠다. 언제고 내가 기독교안에서 충분한 깨달음을 얻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아지는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점차 고쳐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는 새로운 꿈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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