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YES24 카테고리 리스트

YES24 유틸메뉴

Global YES24안내보기

Global YES24는?

K-POP/K-Drama 관련상품(음반,도서,DVD)을
영문/중문 으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Korean wave shopping mall, sell the
K-POP/K-Drama (CD,DVD,Blu-ray,Book) We aceept PayPal/UnionPay/Alipay
and support English/Chinese Language service

English

作为出售正规 K-POP/K-Drama 相关(CD,图书,DVD) 韩流商品的网站, 支持 中文/英文 等海外结账方式

中文

Exclusive ticket sales for domestic and international pop artists

Global yesticket

검색

어깨배너

2월 혜택 모음
슈퍼특가
1/6

빠른분야찾기


Evgeny Kissin 쇼팽 : 피아노 협주곡 1,2번 (Chopin : Piano Concerto) 에브게니 키신
공유하기 예스24 음반 판매 수량은
집계에 반영됩니다. 한터차트/써클차트 집계 반영 안내
쇼팽 콩쿠르 수상자 앨범
CD

Evgeny Kissin 쇼팽 : 피아노 협주곡 1,2번 (Chopin : Piano Concerto) 에브게니 키신

Chopin : Piano Concerto No.1 & 2

[ 1984년 모스크바 연주회 실황 ]
Frederic Chopin 작곡/Evgeny Kissin 연주 | 아울로스 미디어 / 아울로스 미디어 | 2004년 03월 23일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상품 가격정보
판매가 16,000원
할인가 13,400 (16% 할인)
YES포인트
추가혜택쿠폰 및 사은품(1종)
추가혜택쿠폰 쿠폰받기
  • 주문금액대별 할인쿠폰
구매 시 참고사항
구매 시 참고사항
  • 현재 새 상품은 구매 할 수 없습니다. 아래 상품으로 구매하거나 판매 해보세요.

품절

수량
  • 해외배송 가능
1/4
광고 AD

Evgeny Kissin 쇼팽 : 피아노 협주곡 1,2번 (Chopin : Piano Concerto) 에브게니 키신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04년 03월 23일
시간, 무게, 크기 106g

관련분류

음반소개

12살의 키신이 연주한 쇼팽 피아노 협주곡 1984 모스크바 실황!

디스크

CD 1
  • 01 ~03. Chopin : Piano Concerto No.1 in E minor op.11
  • 04 ~06. Chopin : Piano Concerto No.2 in F minor op.21
  • 07 Chopin : Mazurka No.40 in F minor op.63 No.2
  • 08 Chopin : Mazurka No.49 in F minor op.68 No.4
  • 09 Chopin : Waltz No.14 in E minor op.posth.

아티스트 소개 (2명)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프랑스어: Frederic Francois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랑쑤아 쇼뺑,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 이란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프랑스어: Frederic Francois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랑쑤아 쇼뺑,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 이란 별칭을 가진 쇼팽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을 때 쓰던 프랑스어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쇼펜(폴란드어: Fryderyk Franciszek Chopin, 문화어: 프리데리끄 프란찌쉐끄 쇼뺑)이다. ch는 폴란드어에서는 'h' 발음이 나지만, Chopin은 프랑스계 성씨이기 때문에 '쇼팽'이라고 발음한다. 폴란드어에서는 '쇼팽의'는 'Chopina'로 격변화하게 되는데, 이를 '쇼페나'라고 발음한다. 폴란드어에서는 'Szopen'(쇼펜)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쇼팽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운 바르샤바 공국으로부터 서쪽으로 46km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인 젤라조바볼라에서 태어났다. 교구의 세례 기록에는 그의 생일을 1810년 2월 22일로, 이름을 라틴어로 프리데리쿠스 프란치스쿠스(라틴어: Fridericus Franciscus)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폴란드어로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가 된다. 그러나 쇼팽과 그의 가족들은 생일을 3월 1일로 기록하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이 날짜를 진짜 생일로 인정한다.

프리데리크 쇼팽의 아버지인 니콜라 쇼팽(영어:Nicolas Chopin)은 프랑스 로렌 출신으로, 16세가 되던 1787년에 폴란드로 이주해왔다. 니콜라는 폴란드의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고, 1806년에는 그가 가르쳤던 가문 중 하나인 스카르벡(Skarbek)의 가난한 친척인 테클라 유스티나 크리자노프스카(폴란드어: Tekla Justyna Krzyzanowska)와 결혼했다. 프리데리크 쇼팽은 부모가 결혼식을 올린 브로후프(Brochow)에 있는 교회에서 1810년 4월 23일, 부활주일에 세례를 받았다. 이 때 니콜라 쇼팽의 18살짜리 제자인 프리데리크 스카르벡을 대부로 삼았는데, 프리데리크라는 이름도 그에게서 따온 것이다. 프리데리크 쇼팽은 둘째이자 외아들로, 누나인 루드비카(Ludwika, 1807~1855), 여동생 이자벨라(Izabela, 1811~1881)와 에밀리아(Emilia, 1812~1827)가 있었다. 니콜라는 폴란드에 헌신했으며, 가정에서도 폴란드어를 주로 사용하게 했다.

프리데리크가 태어나고 6개월이 지난 1810년 10월, 니콜라가 바르샤바 고등학교 (대학 전단계 학교, 1804~1831에 존재했음)(영어:폴란드어: Liceum Warszawskie)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됨에 따라 바르샤바에 있는 작센 궁정(영어:Saxon Palace) 1층으로 이사한다. 니콜라는 거기서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어머니는 하숙집 소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다. 프리데리크의 체격은 왜소했으며, 어린 시절에 병에 자주 걸렸다.

그의 누이인 루드비카는 피아노를 배웠는데 종종 자신의 동생 프레데리크에게 놀이처럼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루드비카는 프레데리크의 재능을 눈치채었고, 결국 그들의 부모는 프레데리크가 공식적인 레슨을 받도록 한다. 공식적인 레슨을 처음 받게 된 것은 체코 음악가 보이치에흐 지브니(영어:폴란드어 Wojciech ?ywny)에게 1816년부터 1821년까지 교습을 받으면서 부터다. 누나 루드비카도 지브니에게 레슨을 받으며 프리데리크 등 남동생들과 가끔 듀엣을 하기도 했다. 쇼팽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7살 무렵에는 공개 콘서트를 열기 시작했고, 사단조, 내림나장조의 두 폴로네이즈를 작곡했다. 1821년에는 내림가장조 폴로네이즈를 작곡해 지브니에게 헌정하는데, 그 원고는 아직까지 남아있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쇼팽 원고가 된다. 12세 때부터 엘스너에게 작곡 레슨을 받았으며 나중에 엘스너가 세운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들어가게 된다.

1817년 작센 궁전은 바르샤바의 러시아 총독에 의해 군사용으로 징발되었고, 바르샤바 강당은 오늘날 바르샤바 대학교의 총장 집무실인 카지미에슈 궁정(영어:Kazimierz Palace)에 다시 세워졌다. 쇼팽가는 카지미에슈 궁정에 인접한 건물로 이사한다다. 이 기간 동안, 프리데리크는 폴란드 입헌왕국의 통치자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에게 초대받아 그 아들과 종종 놀았는데, 거기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파블로비치 대공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했다. 율리안 우르신 니엠체비치(영어:Julian Ursyn Niemcewicz)는 그의 극적 에클로그 《우리들의 담론Nasze Przebiegi"(1818년)》에서 "꼬마 쇼팽"의 인기를 증언하고 있다.

1822년 스승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그만두었다.

이후 쇼팽은 바르샤바 콘소바토리의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빌헬름 뷔르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4세 때 바르샤바 중학교에 입학하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연극에도 흥미를 가지고 희곡을 써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1826년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며, 1829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발표하고 빈에서 연주회를 열어 이름을 떨치자, 유럽 여러 나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그가 빈에 도착하였을 때 바르샤바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로부터 조국을 위해 음악을 열심히 하는 길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폴란드가 낳은 최초의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다.

1831년 파리에 도착하여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혁명이라는 격정적인 연습곡을 작곡하였다. 1832년 파리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열어 성공함으로써, 그 후 파리 사교계의 유명한 인물이 되었으나 그는 늘 조국과 친구와 가족을 걱정하며 고독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즉흥 연주에도 뛰어났으며, 침착한 성품으로 그의 전주곡이나 연습곡은 예술적 수준이 높은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1830년대 초중반의 파리는 작곡가를 위한 시기였다. 쇼팽이 유명한 작품들을 남긴 것이 이 때이다. 1838년경에 그는 파리 시민들에게 유명해졌다. 그의 친구로 프란츠 리스트, 빈첸초 벨리니, 외젠 들라크루아가 있었다. 쇼팽은 헥토르 베를리오즈와 로베르트 슈만과도 친했는데, 그들의 음악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1836년에 쇼팽은 17살의 폴란드 소녀인 마리아 보진스카와 비밀 약혼을 했고 나중에 취소했다. 같은 해에, 마리 다굴 백작 부인이 연 파티에서 쇼팽은 소설가이자 애인인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쇼팽과 상드의 연애관계는 18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그들의 애정 관계는 9년간 지속되었고, 쇼팽의 건강 악화와 상드의 자녀들 문제로 헤어졌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는 스페인 마요르카의 버려진 가톨릭교회 수도원인 발데모사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1838년 ~ 1839년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닥쳤다. 쇼팽은 파리에서 먼 길을 거쳐 피아노를 가져와서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쇼팽은 그 절박한 시간의 기분을 스물 네 개의 전주곡(작품번호 28)에 담았다. 그 작품의 대부분은 마요르카에서 쓰여진 것이다. 추위는 쇼팽의 건강과 폐병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와 조르주 상드의 관계가 불륜으로 의심받아 비난과 푸대접을 받았다. 결국 파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쇼팽은 그 일 이후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1840년대에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와 상드는 노앙을 포함한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1849년 쇼팽은 모든 작품을 완성하고 마주르카와 녹턴에만 전념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러시아의 폴란드 혁명진압으로 발생한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에 참여하였다. 그의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 바 단조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를 생각하면서 지은 민족주의적인 곡이다.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이지만 그의 친지가 부검한 결과가 이전 검진결과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낭포성 섬유증이나 폐기종 같은 다른 질병을 앓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다.

로마 가톨릭 성 마들렌 교회에서 열리게 된 그의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 을 연주하기로 했다. 레퀴엠에는 여자 성악가의 역할이 크지만 마들렌 교회에서는 합창단에 여자 가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마찰 때문에 장례식이 2주 동안 연기되었고, 결국 교회 측에서 쇼팽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양보했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 Pere Lachaise에 안장되었다. 그의 심장은 누나 루드비카 옝제예비치(Ludwika Jedrzejewicz)가 전달 받아 폴란드로 가져간 뒤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있는 기념비 밑에 안치되었다.

21세기에 들어 보존된 그의 심장이 담긴 병을 열지 않고 관찰한 결과 심낭염으로 사망했다는 소견이 나왔다. 쇼팽이 앓았던 결핵은 심낭염의 일종인 결핵성 심낭염의 원인이다.

쇼팽은 필드가 창시한 살롱음악인 녹턴을 깊고 세련된 장르로 승화시켰으며, 일반적인 춤곡인 폴란드의 마주르카나 빈의 왈츠의 선율과 표현의 폭을 넓혔다. 또한 전주곡을 독립적인 장르로 만든 장본인이다.

쇼팽의 곡은 독특한 선율로 많은 대중들에게 공감을 만들어낸다. 그중에는 《혁명 연습곡》과 《강아지 왈츠》가 있다. 《장송 행진곡,전주곡 제 4번》은 지금까지도 슬픔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곡으로 쓰이고 있다. 《즉흥환상곡》 은 쇼팽 시절의 오페라 선율을 모방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반음계를 구사한 곡이다. 쇼팽은 노래하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해 피아노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종종 자신이 도니제티와 빈첸초 벨리니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쇼팽의 작품과 재능은 다른 작곡가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슈만은 쇼팽의 선율을 따서 작곡한 그의 《사육제》를 쇼팽에게 헌정했다. 프란츠 리스트는 그의 《Harmonies Poetiques et Religieuses》 가운데 한 악장인 〈Funerailles〉를 쇼팽에게 헌정했고 그 때가 의미심장하게도 1849년 10월이었다. 그 곡의 중간 부분은 쇼팽의 유명한 폴로네이즈 53번의 옥타브 트리오를 연상케 한다.

전주곡과 연습곡을 포함한 많은 쇼팽의 곡들이 그만의 고유한 기교를 띠고 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과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은 이 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양 고전음악에서 쇼팽의 음악은 낭만주의 시대에 속한다. 하지만 쇼팽 자신은 낭만주의 조류에 관심이 없었거나 싫어했고 자기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쇼팽의 작품을 전형적인 낭만주의 음악으로 보고있다.

약 200곡에 달하는 그의 작품들은 대다수가 피아노를 위한 것이였고 오로지 몇몇만이 다른 악기를 위한 곡이였다. 실내악에 관하여서는 바이올린보다 주로 첼로와 피아노에 대해 썼고, 이조차도 모두 네 곡 밖에 되지 않는다.

바르샤바에 살 때 쇼팽은 부흐홀츠의 피아노를 사용했다. 나중에 파리에서 사는 동안에는 플라이에에서 악기를 구입했습니다. 그는 플라이에(Pleyel et Cie)의 피아노를 '그 이상은 없다'는 뜻의 "비 플러스 울트라"로 평가한다. 리스트는 파리에서 쇼팽과 친구가되었고 쇼팽의 플라이에 피아노의 소리를 "수정과 물의 결합"으로 묘사한다. 런던에서 쇼팽은 "나는 3대의 피아노, 플라이에, 브로드우드 및 에라르드가 놓인 대형 응접실이 있다네" 라는 내용의 편지를 쓴다.

2018 년 폴 맥널티가 만든 쇼팽의 부흐홀츠 피아노는 폴란드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바르샤바 쇼팽 연구소에서 최초의 시대 악기 국제 쇼팽 콩쿠르에 사용되었다.
연주 : Evgeny Kissin (예프게니 키신 )
1971년 10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항공 우주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여섯 살의 나이에 모스크바 그네신 음악원 영재 학교에 입학하여 안나 파블로브나 칸토르에게 배웠으며 그녀는 그의 평생 유일한 스승으로 남아 있다. 1984년 열두 살의 나이에 드미트리 키타옌코의 지휘로 모스크바 음악원 대극장에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연주했으며 이 유명한 콘서트는 그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하고... 1971년 10월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항공 우주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피아노 선생님이었다. 여섯 살의 나이에 모스크바 그네신 음악원 영재 학교에 입학하여 안나 파블로브나 칸토르에게 배웠으며 그녀는 그의 평생 유일한 스승으로 남아 있다. 1984년 열두 살의 나이에 드미트리 키타옌코의 지휘로 모스크바 음악원 대극장에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연주했으며 이 유명한 콘서트는 그의 경력에서 가장 중요하고 인상적인 연주회로 기억된다. 그는 그날 저녁까지 사실상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고 다음날 아침 그는 이후 시작되는 전설의 주인공이 된다. 1985년 동유럽 무대 데뷔 후 1987년 베를린 페스티벌을 통해 서유럽 무대에 데뷔했고, 1988년 12월 신년 음악회에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한 연주가 전 세계에 방영되면서 많은 이들의 기억에 각인된다. 1990년 런던의 BBC 프롬스 콘서트에 처음으로 출연했으며, 같은 해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하면서 북미 에 데뷔했다. 1997년 그는 러시아 공화국에서 수여하는 가장 높은 문화 훈장인 트리움프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BBC 프롬스 역사상 최초로 피아노 독주회를 가졌다. 1991년 러시아 시민 혁명 직후 뉴욕으로 이주했으며 2002년 영국 국적을, 2013년에는 이스라엘 국적을 취득했다. 자신도 신동으로 경력을 시작했던 피아니스트 레오폴트 고도프스키의 ‘놀라움이 사라지고 나면 어린 아이만 남을 뿐’이라는 경구를 무시하기라도 하듯 신동을 뛰어넘어 현재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피아니스트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Chopin 1810-1849 piano : Evgeny Kissin Moscow Philharmonic Orchestra conductor : Dmitri Kitaenko Recorded : Live Recording 1984

제작사 리뷰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The Moscow Philharmonic Orchestra)
드미트리 키타옌코(Dmitri Kitaenko)
기념비적인 실황 기록
가공할만한 힘과 테크닉
천부적 재능의 증거 - 1984년 키신의 전설적인 모스크바 연주에 대하여 - 1980년대 중반의 신동

추천평

그런데, 쇼팽의 협주곡들에 표현된 그 열렬한 정서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 그 부분이란 작곡가의 열정이 과연 그의 연인 콘스탄차 혼자의 몫이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실 느린 악장을 제외한 1,3악장에 구사된 열정적 음형들은 너무 뜨거워 종종 '피가 끓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많은데, 그런 느낌은 쇼팽의 열정이 한 여인을 향한 것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섞인 추측을 낳는다. 그렇다면 콘스탄차 말고 그 열정의 대상으로는 또 누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대상은 또 다른 어떤 여성이 아니고, 쇼팽의 조국 폴란드였으리라. 그 추측의 근거로 쇼팽이 두 협주곡 3악장에 공히 폴란드 춤곡에 근거한 에피소드-F단조에서는 마주르카, E단조에서는 크라코비아크-를 쓰고 있다는 점을 제시해볼 수 있겠다. 두 협주곡의 3악장에 폴란드 춤곡을 찬란하게 수놓음으로써 쇼팽은 자신의 애국심을 열렬하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쇼팽의 작품은 혼란한 정국에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폴란드 국민들의 열정적인 환호를 받을만한 요건을 충분히 갖춘 것이었고, 쇼팽의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자 바르샤바 언론은 즉각 다음과 같은 말로 폴란드 아들을 추켜세우기도 했다. "쇼팽은 우리의 들과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폴란드 마을 주민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본토의 선율을 능숙한 작품으로 그리고 우아한 모양으로 통합시켜놓았다."
물론 쇼팽의 음악에 포함된 그런 민족적인 색깔의 정열에는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사실 쇼팽이 끝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와 관련하여, 그 위대한 예술가가 정치적인 성향을 띤 어떤 인물이기도 했다는 점이 폴란드의 몇몇 쇼팽 전기 작가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는데, 쇼팽과 동갑으로 유명한 비평가이기도 했던 음악가 슈만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에 포함된 그 예사롭지 않은 정열에 대해서 그와 비슷한 혐의를 두기도 했었다. 슈만은 쇼팽이 자신의 협주곡들을 바르샤바 대중들에게 소개하면서 당시 음악계를 정복하려는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쇼팽의 두 피아노 협주곡을'장미 안에 숨긴 총'이라고 불렀다. '사랑을 가장한 정치였다'는 의미로 풀 수 있겠다.
아무튼 이런 얘기까지 끌어들인다면, 쇼팽이 두 협주곡들에 표현한 뜨거운 열정이 오로지 한 여인을 향한 것이었다고 단정하긴 어려워 보인다. 쇼팽은 자신의 음악을 통해 마음속 여인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얘기함과 동시에 조국 폴란드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발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두 협주곡이 바르샤바에서 마지막으로 띄운 쇼팽의 열렬한 연애편지라고 한다면, 그가 겉봉투의 받는 이 주소에 썼던 수취자는 콘스탄차와 폴란드, 그렇게 둘이었을 것이다!
.
E단조 협주곡의 '라르게토' 악장을 쓰면서도 쇼팽은 콘스탄차를 가슴속에 꽉 채우고 있었다. 1830년 5월 15일 티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쇼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악장은 요란한 악장이 아니야-그것은 고요하고 우울한, 아주 진한 로망스라네; 수많은 소중한 추억들을 생각나게 하는 그때 그 장소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갖고 있어야 하지. 그것은 아름다운 봄날, 달빛이 비치는 곳에서 잠기는 일종의 명상이라네."
이렇게 로맨틱한 정서를 몸에 감고 쓴 E단조 협주곡을 쇼팽은 1830년 10월 11일 바르샤바의 한 극장에서 공개했다. 잘 알려진 대로 쇼팽은 이 즈음에서 암울한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 떠나야 하는 운명을 겪게 되는데, 바르샤바 연주회는 이제 그 운명의 날을 한달도 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열렸다. 물론 그것은 그의 고별 콘서트였던 것이다.
이 고별 콘서트에는 쇼팽의 마음속 여인 콘스탄차가 독창자로 등장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 사실만으로도 쇼팽은 당시 몹시 긴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조국 땅을 다시는 밟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과 콘스탄차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뒤엉켜 쇼팽이 느낀 석별의 정은 아주 각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콘스탄차는 콘서트 무대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머리에는 장미꽃을 꽂고 있었다. 그녀는 로시니의 카바티나를 불렀는데, 쇼팽은 여성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완전히 도취되어 있었다. 당장 그녀 옆에 가서 팔짱을 끼고는"우리 결혼하자"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의 하얀 드레스가 무대용이 아닌 결혼 예식용이었으면 하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E단조 협주곡이 울려 퍼지던 그날 그 고별 연주회에서 쇼팽의 가슴은 그렇게 극도의 흥분상태에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쇼팽이 자신의 협주곡에 콘스탄차에 대한 상념을 얼마나 쏟아 부었는지,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실제로 작품 속에 어느 정도 들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하늘나라에 있는 쇼팽에게 물어본다면, 그는 이 곡에 얽힌 콘스탄차와의 진한 추억을 분명히 얘기할 것이다. 자신의 고별 콘서트에 나타난 첫사랑! 머리에 장미꽃을 얹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던 고혹적인 여인의 모습을 쇼팽이 어떻게 잊을 수 있었으랴!
그러나 사랑과 운명의 길은 다를 때가 많은 법. 쇼팽과 콘스탄차의 관계는 쇼팽의 일방적인 짝사랑 사건으로 마무리되고 만다. 허약한 몸으로 여성들 틈에 끼어 곱게 자랐던 쇼팽은 자신의 열정을 콘스탄차에게 제대로 표현해보지도 못했었고, 콘스탄차는 쇼팽의 마음의 창을 통해서는 수줍은 껍데기로 싸인 뜨거운 감정의 내용을 읽어내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쇼팽이 죽은 후 그녀는 쇼팽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은 말로 기억하는 정도로 그쳤다."그는 신경이 예민했고, 환상이 풍부했지만,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쇼팽은 그녀 때문에 협주곡까지 쓰며 열병을 앓았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예술가의 성격만을 가까스로 파악했던 것 같다. 어쨌든 쇼팽의 첫사랑은 불발이었지만 두 협주곡에 표현한 감정은 너무도 뜨겁다. 그것은 한 청년 음악가가 자신의 온 정열을 불살라 쓴 열렬한 연애편지였기 때문이다!
.
1829년 10월 3일, 19세 청년 쇼팽은 친구인 티투스 보이체호프스키(Titus Woyciechowski)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불행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내게는 이상형의 여인이 생겼다네, 지금까지 반년 동안, 그녀에 대한 꿈을 꾸며 조용히 그녀에게 몰두해왔어. 그녀를 생각하면서 나는 협주곡의 아다지오를 썼지. 그리고 내가 보내는 작은 월츠(이 작품은 Op.70-3을 말한다)는, 오늘 아침 그녀가 영감을 줘서 쓴 것이야... 난 자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종종 내 피아노한테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이 편지 대목으로 쉽게 알 수 있듯이, 쇼팽은 F단조 협주곡의 느린 악장을 쓰면서 한 아가씨를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쇼팽의 가슴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그 여인은 흔히 쇼팽의 첫사랑으로 회자되는 소프라노 가수 콘스탄차 글라드코프스카(Konstancja Gladkowska)였다.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원에 다닐 때인 1826년에 콘스탄차를 처음 만났고, 그 후로 약 3년간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키워왔는데, 협주곡을 쓰던 때는 쇼팽이 그녀 때문에 한창 열병을 앓고 있었던 시점에 속한다. 따라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내용까지 참조하면 콘스탄차한테서 느낀 작곡가의 은밀한 감정이 F단조 협주곡을 쓰게 된 동인이었을 거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조금 후에 얘기하겠지만, 이어서 쓰게 된 E단조 협주곡 역시 포근하고 열정적인 악상들로 미루어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심리상태를 그대로 표현한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두 편의 피아노 협주곡이 쇼팽의 콘스탄차에 대한 연애편지일 것이라는 주장은 호사가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그런 추측은 너무 강하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쇼팽은 짧은 생애에서 늘 자신의 음악적 분위기에 맞는 이상적 여성상을 필요로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 때문에 쇼팽은 '바람둥이 기질의 남자'라는 혐의에서 당장은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속에 늘 아름다운 여성상을 간직하고 자신의 마음을 끄는 여성이 생기면 끊임없이 그 이상형에 대입하곤 하던 많은 낭만주의 예술가들한테서 흔히 볼 수 있는 태도였음을 감안하면 19세기 예술가 쇼팽을 이해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협주곡의 내용은 콘스탄차라는 특정인의 모습이나 이미지의 묘사였다기보다는 콘스탄차로 인해 촉발된 작곡가 자신의 요동치는 열정과 따스한 사랑의 감정표현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즉 콘스탄차의 이미지는 쇼팽 자신이 이미 갖고 있던 아름다운 이상형에 대한 외관을 진하게 자극한 하나의 촉매(catalyst)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생각해볼 부분이 많겠지만, 어쨌거나 쇼팽의 협주곡이 한 여인을 향한 마음에서 비롯된 수많은 낭만주의 명곡들 중 하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쇼팽은 1830년 3월 3일에 아버지 집 응접실에 모인 손님들에게 F단조 협주곡을 먼저 들려주었다. 피아노는 자신이 연주했고, 바르샤바 오페라의 지휘자였던 카롤 쿠르핀스키(Karol Kurpinski)가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3월 17일에는 드디어 바르샤바 국립 극장에서 공개 초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 콘서트는 3일 내내 티켓이 매진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초연 현장에서 느낀 점을 쇼팽은 친구 티투스에게 다음과 같이 스케치해주었다. "처음 알레그로 부분을 쉽게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거야." 그러나"아다지오와 론도는 아주 효과적이었어.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외침을 듣지 않았을까 싶은데"... 무대 바로 앞에서는 내가 너무 부드럽게 연주했다고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었지" 이렇게 말하는 쇼팽은 분명히 그날 자신의 연주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당시 어떤 음악 애호가는 그날 연주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쇼팽의 콘서트에서 막(저녁 11시에)돌아왔다. 나는 쇼팽이 일곱 살 때 연주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때부터 그는 미래의 희망이었다. 오늘 그의 연주는 정말 아름다웠다! 얼마나 유창하게 연주하는지! 얼마나 완벽하게 연주하는지-그 어떤 사람이라도 그렇게 두 손을 완벽하게 일치시켜 연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음악은 진하게 표현된 정서와 노래로 넘쳐났다. 그가 겪었던 모든 행복한 순간들을 추억하게 만들면서 청중들을 미묘한 포로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이 애호가의 말은 감동적이며 성공적이었던 그 연주회의 분위기를 잘 전달해주고 있는데, 그의 말에서'행복한 순간의 추억'이란 콘스탄차와 관련된 쇼팽의 연애추억을 뜻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
쇼팽이 남긴 유명한 두 피아노 협주곡은 E단조인 Op.11의 1번과 F단조인 Op.21의 2번이다. 작품번호 상으로는 분명히 E단조가 F단조 보다 앞서 있다. 그런데 사실은 E단조가 F단조보다 늦게 씌어진 작품이다. 쇼팽은 1829년 가을부터 1830년 초까지 F단조 협주곡을 썼고, 그 다음에 1830년 4월부터 8월 21일까지 E단조 협주곡을 썼다. 즉 쇼팽의 작업순서로 보면 2번이 첫 번째 협주곡이고, 1번이 두 번째 협주곡인 셈이다. 그러면 왜 작품번호 상의 순서가 뒤바뀌었을까? 그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은 F단조 협주곡의 오케스트라 파트를 베끼는 일이 지체되어 E단조 협주곡이 먼저 출판되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쇼팽의 두 피아노 협주곡을 담은 음반들을 만나다보면 가끔 2번을 앞에, 1번을 뒤에다 놓은 것들도 눈에 띄는데, 그것은 2번이 1번 보다 먼저 씌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생긴 결과다.
두 협주곡은 쇼팽이 고국 폴란드와 작별을 고하기 직전에, 그러니까 그의 나이가 막 스무 살로 진입하려고 하던 때에 거의 연속으로 쓴 작품이다. 양식적으로는 훔멜(Hummel 1778-1837)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것이 주된 특징으로 보이는데, 청년기의 작품인 만큼, 내용적인 깊이나 작곡 기교면에서 비범하고 원숙한 후년의 작품들에는 견줄 수 없다. 즉 천재 쇼팽의 최상의 작품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종종 지적되어 온 것이지만 그의 협주곡에 씌어진 오케스트레이션은 아주 평범할 뿐 아니라 명백하게 결점까지 포함하고 있다. 쇼팽이 관현악법에 매우 서투른 작곡가였다는 사실은 당대의 많은 음악인들이 잘 간파하고 있었는데, 특히 베를리오즈 같은 작곡가는 그 부분에 대해서 쇼팽을 혹독하게 비난했던 음악가로 잘 알려져 있다. 베를리오즈는 쇼팽의 관현악 반주부분을 썰렁하고 사실상 쓸모없는 것이라고 단정해버렸다. 베를리오즈 같은 관현악 대가의 시각으로 본다면 쇼팽의 오케스트레이션은 그런 혹평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가 쇼팽을 옹호할 방법은 없을까? 사실 쇼팽이 관현악 반주에 충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오로지 피아노 음악에만 몰두했던'피아노의 시인'은 정식으로 관현악법을 배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오케스트레이션의 약점을 포함하고 있어도, 두 작품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런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후배 작곡가들은 아름다운 작품을 보다 완벽한 형식으로 즐기기 위해 쇼팽의 원작에 손질을 가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이른바 평본(critical edition)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 평본들 가운데는 독일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클린트보르트(Klindworth, Karl 1830-1916)가 쓴 F단조 협주곡 편곡판과 타우지히(Tausig, Karl 1841-1871)가 쓴 E단조 협주곡 편곡 버전이 특히 유명하다. 클린트보르트의 F단조 편곡판은 피아노독주부까지 확장시켜 보다 큰 스케일의 음악으로 만든 것이고, 타우지히의 E단조 버전은 오늘날 즐겨 연주되는 대표적인 판본이다. 그 외 발라키레프가 2악장 로망스 부분만을 독주 콘서트버전으로 만든 것도 있다. 물론 이들 후대 작곡가들의 편곡 작업으로 쇼팽 오케스트레이션의 약점은 상당부분 보완되었는데, 사람들은 보다 튼튼한 구조와 형식을 갖추고 다시 태어난 그 평본 협주곡들을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쇼팽의 원래 작품이 지닌 소박한 맛을 즐기려는 욕구도 끊이지 않았고, 따라서 원곡대로 연주하는 일도 꾸준히 이어졌다. 쇼팽의 관현악 쓰기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사실 베를리오즈 같은 유능한 관현악 작곡가의 눈과 귀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쉽게 판단내릴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정격음악에 익숙해진 현재의 우리는 관현악부의 내용이 상당히 축약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서 너무 예리한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그렇게 간결하고 아담한 오케스트레이션이 쇼팽에게 있어서는 미적 필요에 의한 필연적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협주곡처럼 섬세하고 개인적인 성격의 피아노 독주파트를 가진 작품에는 그런 소박한 관현악 반주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은 아주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 차제에 원전 연주가 성행하고 있는 요즘 같은 때에 원본을 위한 변명의 차원에서 그런 견해도 충분히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음을 알아둘 필요는 있다고 본다. 더 힘을 내서 변론하자면, 솔직하게 말해, 쇼팽의 협주곡들에는 약점보다 장점이 훨씬 더 많다. 그 주도면밀하고 현란한 표현, 누가 들어도'풋풋한 청년기의 작품'이란 판단을 금방 내리게 하는 참신하고 싱그러운 낭만적 정서는 그의 원숙기 작품에서도, 또 그 시대 어떤 탁월한 작곡가들의 작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그러면 두 협주곡 작품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구체적인 얘기를 해보자.
.

회원리뷰 (0건)

매주 10건의 우수리뷰를 선정하여 YES포인트 3만원을 드립니다.
3,000원 이상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일반회원 300원, 마니아회원 6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eBook은 다운로드 후 작성한 리뷰만 YES포인트 지급됩니다.
클래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됩니다. 리뷰/한줄평 정책 자세히 보기
리뷰쓰기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0건)

1,000원 이상 구매 후 한줄평 작성 시 일반회원 50원, 마니아회원 100원의 YES포인트를 드립니다.
eBook은 다운로드 후 작성한 리뷰만 YES포인트 지급됩니다.
클래스, CD/LP, DVD/Blu-ray, 패션 및 판매금지 상품, 예스24 앱스토어 상품 제외됩니다. 리뷰/한줄평 정책 자세히 보기
0/50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배송 안내
배송 구분 예스24 배송
  •  배송비 : 2,500원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포스터 안내
  •  구매하신 상품에 포스터 사은품이 있는 경우, 포스터는 상품 수량과 동일한 수량이 제공됩니다.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반품/교환 방법
  •  마이페이지 > 반품/교환 신청 및 조회, 1:1 문의,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맨위로
예스이십사(주)
대표 : 김석환, 최세라 주소 : 서울시 영등포구 은행로 11, 5층~6층(여의도동,일신빌딩) 사업자등록번호 : 229-81-37000   통신판매업신고 : 제 2005-02682호 사업자 정보확인 이메일 : yes24help@yes24.com   호스팅 서비스사업자 : 예스이십사(주)
YES24 수상내역 정보보호 관리체계 ISMS인증획득 개인정보보호 우수사이트
소비자피해보상보험 서울보증보험
고객님은 안전거래를 위해 현금 등으로 결제 시 저희 쇼핑몰에서 가입한 구매안전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서비스가입사실 확인
EQUUS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