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쇼팽의 협주곡들에 표현된 그 열렬한 정서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 그 부분이란 작곡가의 열정이 과연 그의 연인 콘스탄차 혼자의 몫이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실 느린 악장을 제외한 1,3악장에 구사된 열정적 음형들은 너무 뜨거워 종종 '피가 끓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많은데, 그런 느낌은 쇼팽의 열정이 한 여인을 향한 것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섞인 추측을 낳는다. 그렇다면 콘스탄차 말고 그 열정의 대상으로는 또 누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대상은 또 다른 어떤 여성이 아니고, 쇼팽의 조국 폴란드였으리라. 그 추측의 근거로 쇼팽이 두 협주곡 3악장에 공히 폴란드 춤곡에 근거한 에피소드-F단조에서는 마주르카, E단조에서는 크라코비아크-를 쓰고 있다는 점을 제시해볼 수 있겠다. 두 협주곡의 3악장에 폴란드 춤곡을 찬란하게 수놓음으로써 쇼팽은 자신의 애국심을 열렬하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쇼팽의 작품은 혼란한 정국에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폴란드 국민들의 열정적인 환호를 받을만한 요건을 충분히 갖춘 것이었고, 쇼팽의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자 바르샤바 언론은 즉각 다음과 같은 말로 폴란드 아들을 추켜세우기도 했다. "쇼팽은 우리의 들과 숲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폴란드 마을 주민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본토의 선율을 능숙한 작품으로 그리고 우아한 모양으로 통합시켜놓았다."
물론 쇼팽의 음악에 포함된 그런 민족적인 색깔의 정열에는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사실 쇼팽이 끝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와 관련하여, 그 위대한 예술가가 정치적인 성향을 띤 어떤 인물이기도 했다는 점이 폴란드의 몇몇 쇼팽 전기 작가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는데, 쇼팽과 동갑으로 유명한 비평가이기도 했던 음악가 슈만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에 포함된 그 예사롭지 않은 정열에 대해서 그와 비슷한 혐의를 두기도 했었다. 슈만은 쇼팽이 자신의 협주곡들을 바르샤바 대중들에게 소개하면서 당시 음악계를 정복하려는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쇼팽의 두 피아노 협주곡을'장미 안에 숨긴 총'이라고 불렀다. '사랑을 가장한 정치였다'는 의미로 풀 수 있겠다.
아무튼 이런 얘기까지 끌어들인다면, 쇼팽이 두 협주곡들에 표현한 뜨거운 열정이 오로지 한 여인을 향한 것이었다고 단정하긴 어려워 보인다. 쇼팽은 자신의 음악을 통해 마음속 여인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얘기함과 동시에 조국 폴란드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발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두 협주곡이 바르샤바에서 마지막으로 띄운 쇼팽의 열렬한 연애편지라고 한다면, 그가 겉봉투의 받는 이 주소에 썼던 수취자는 콘스탄차와 폴란드, 그렇게 둘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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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단조 협주곡의 '라르게토' 악장을 쓰면서도 쇼팽은 콘스탄차를 가슴속에 꽉 채우고 있었다. 1830년 5월 15일 티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쇼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악장은 요란한 악장이 아니야-그것은 고요하고 우울한, 아주 진한 로망스라네; 수많은 소중한 추억들을 생각나게 하는 그때 그 장소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갖고 있어야 하지. 그것은 아름다운 봄날, 달빛이 비치는 곳에서 잠기는 일종의 명상이라네."
이렇게 로맨틱한 정서를 몸에 감고 쓴 E단조 협주곡을 쇼팽은 1830년 10월 11일 바르샤바의 한 극장에서 공개했다. 잘 알려진 대로 쇼팽은 이 즈음에서 암울한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 떠나야 하는 운명을 겪게 되는데, 바르샤바 연주회는 이제 그 운명의 날을 한달도 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열렸다. 물론 그것은 그의 고별 콘서트였던 것이다.
이 고별 콘서트에는 쇼팽의 마음속 여인 콘스탄차가 독창자로 등장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 사실만으로도 쇼팽은 당시 몹시 긴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조국 땅을 다시는 밟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과 콘스탄차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뒤엉켜 쇼팽이 느낀 석별의 정은 아주 각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콘스탄차는 콘서트 무대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머리에는 장미꽃을 꽂고 있었다. 그녀는 로시니의 카바티나를 불렀는데, 쇼팽은 여성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완전히 도취되어 있었다. 당장 그녀 옆에 가서 팔짱을 끼고는"우리 결혼하자"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의 하얀 드레스가 무대용이 아닌 결혼 예식용이었으면 하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E단조 협주곡이 울려 퍼지던 그날 그 고별 연주회에서 쇼팽의 가슴은 그렇게 극도의 흥분상태에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쇼팽이 자신의 협주곡에 콘스탄차에 대한 상념을 얼마나 쏟아 부었는지, 그녀에 대한 이미지가 실제로 작품 속에 어느 정도 들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하늘나라에 있는 쇼팽에게 물어본다면, 그는 이 곡에 얽힌 콘스탄차와의 진한 추억을 분명히 얘기할 것이다. 자신의 고별 콘서트에 나타난 첫사랑! 머리에 장미꽃을 얹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던 고혹적인 여인의 모습을 쇼팽이 어떻게 잊을 수 있었으랴!
그러나 사랑과 운명의 길은 다를 때가 많은 법. 쇼팽과 콘스탄차의 관계는 쇼팽의 일방적인 짝사랑 사건으로 마무리되고 만다. 허약한 몸으로 여성들 틈에 끼어 곱게 자랐던 쇼팽은 자신의 열정을 콘스탄차에게 제대로 표현해보지도 못했었고, 콘스탄차는 쇼팽의 마음의 창을 통해서는 수줍은 껍데기로 싸인 뜨거운 감정의 내용을 읽어내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쇼팽이 죽은 후 그녀는 쇼팽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은 말로 기억하는 정도로 그쳤다."그는 신경이 예민했고, 환상이 풍부했지만,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쇼팽은 그녀 때문에 협주곡까지 쓰며 열병을 앓았지만 그녀는 그에게서 예술가의 성격만을 가까스로 파악했던 것 같다. 어쨌든 쇼팽의 첫사랑은 불발이었지만 두 협주곡에 표현한 감정은 너무도 뜨겁다. 그것은 한 청년 음악가가 자신의 온 정열을 불살라 쓴 열렬한 연애편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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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 10월 3일, 19세 청년 쇼팽은 친구인 티투스 보이체호프스키(Titus Woyciechowski)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불행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내게는 이상형의 여인이 생겼다네, 지금까지 반년 동안, 그녀에 대한 꿈을 꾸며 조용히 그녀에게 몰두해왔어. 그녀를 생각하면서 나는 협주곡의 아다지오를 썼지. 그리고 내가 보내는 작은 월츠(이 작품은 Op.70-3을 말한다)는, 오늘 아침 그녀가 영감을 줘서 쓴 것이야... 난 자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종종 내 피아노한테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이 편지 대목으로 쉽게 알 수 있듯이, 쇼팽은 F단조 협주곡의 느린 악장을 쓰면서 한 아가씨를 많이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쇼팽의 가슴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그 여인은 흔히 쇼팽의 첫사랑으로 회자되는 소프라노 가수 콘스탄차 글라드코프스카(Konstancja Gladkowska)였다.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원에 다닐 때인 1826년에 콘스탄차를 처음 만났고, 그 후로 약 3년간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키워왔는데, 협주곡을 쓰던 때는 쇼팽이 그녀 때문에 한창 열병을 앓고 있었던 시점에 속한다. 따라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내용까지 참조하면 콘스탄차한테서 느낀 작곡가의 은밀한 감정이 F단조 협주곡을 쓰게 된 동인이었을 거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조금 후에 얘기하겠지만, 이어서 쓰게 된 E단조 협주곡 역시 포근하고 열정적인 악상들로 미루어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심리상태를 그대로 표현한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두 편의 피아노 협주곡이 쇼팽의 콘스탄차에 대한 연애편지일 것이라는 주장은 호사가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그런 추측은 너무 강하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쇼팽은 짧은 생애에서 늘 자신의 음악적 분위기에 맞는 이상적 여성상을 필요로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 때문에 쇼팽은 '바람둥이 기질의 남자'라는 혐의에서 당장은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마음속에 늘 아름다운 여성상을 간직하고 자신의 마음을 끄는 여성이 생기면 끊임없이 그 이상형에 대입하곤 하던 많은 낭만주의 예술가들한테서 흔히 볼 수 있는 태도였음을 감안하면 19세기 예술가 쇼팽을 이해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협주곡의 내용은 콘스탄차라는 특정인의 모습이나 이미지의 묘사였다기보다는 콘스탄차로 인해 촉발된 작곡가 자신의 요동치는 열정과 따스한 사랑의 감정표현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즉 콘스탄차의 이미지는 쇼팽 자신이 이미 갖고 있던 아름다운 이상형에 대한 외관을 진하게 자극한 하나의 촉매(catalyst)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생각해볼 부분이 많겠지만, 어쨌거나 쇼팽의 협주곡이 한 여인을 향한 마음에서 비롯된 수많은 낭만주의 명곡들 중 하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쇼팽은 1830년 3월 3일에 아버지 집 응접실에 모인 손님들에게 F단조 협주곡을 먼저 들려주었다. 피아노는 자신이 연주했고, 바르샤바 오페라의 지휘자였던 카롤 쿠르핀스키(Karol Kurpinski)가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3월 17일에는 드디어 바르샤바 국립 극장에서 공개 초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 콘서트는 3일 내내 티켓이 매진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초연 현장에서 느낀 점을 쇼팽은 친구 티투스에게 다음과 같이 스케치해주었다. "처음 알레그로 부분을 쉽게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거야." 그러나"아다지오와 론도는 아주 효과적이었어.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솟아나는 외침을 듣지 않았을까 싶은데"... 무대 바로 앞에서는 내가 너무 부드럽게 연주했다고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었지" 이렇게 말하는 쇼팽은 분명히 그날 자신의 연주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당시 어떤 음악 애호가는 그날 연주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쇼팽의 콘서트에서 막(저녁 11시에)돌아왔다. 나는 쇼팽이 일곱 살 때 연주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때부터 그는 미래의 희망이었다. 오늘 그의 연주는 정말 아름다웠다! 얼마나 유창하게 연주하는지! 얼마나 완벽하게 연주하는지-그 어떤 사람이라도 그렇게 두 손을 완벽하게 일치시켜 연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음악은 진하게 표현된 정서와 노래로 넘쳐났다. 그가 겪었던 모든 행복한 순간들을 추억하게 만들면서 청중들을 미묘한 포로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이 애호가의 말은 감동적이며 성공적이었던 그 연주회의 분위기를 잘 전달해주고 있는데, 그의 말에서'행복한 순간의 추억'이란 콘스탄차와 관련된 쇼팽의 연애추억을 뜻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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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이 남긴 유명한 두 피아노 협주곡은 E단조인 Op.11의 1번과 F단조인 Op.21의 2번이다. 작품번호 상으로는 분명히 E단조가 F단조 보다 앞서 있다. 그런데 사실은 E단조가 F단조보다 늦게 씌어진 작품이다. 쇼팽은 1829년 가을부터 1830년 초까지 F단조 협주곡을 썼고, 그 다음에 1830년 4월부터 8월 21일까지 E단조 협주곡을 썼다. 즉 쇼팽의 작업순서로 보면 2번이 첫 번째 협주곡이고, 1번이 두 번째 협주곡인 셈이다. 그러면 왜 작품번호 상의 순서가 뒤바뀌었을까? 그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은 F단조 협주곡의 오케스트라 파트를 베끼는 일이 지체되어 E단조 협주곡이 먼저 출판되었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쇼팽의 두 피아노 협주곡을 담은 음반들을 만나다보면 가끔 2번을 앞에, 1번을 뒤에다 놓은 것들도 눈에 띄는데, 그것은 2번이 1번 보다 먼저 씌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생긴 결과다.
두 협주곡은 쇼팽이 고국 폴란드와 작별을 고하기 직전에, 그러니까 그의 나이가 막 스무 살로 진입하려고 하던 때에 거의 연속으로 쓴 작품이다. 양식적으로는 훔멜(Hummel 1778-1837)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것이 주된 특징으로 보이는데, 청년기의 작품인 만큼, 내용적인 깊이나 작곡 기교면에서 비범하고 원숙한 후년의 작품들에는 견줄 수 없다. 즉 천재 쇼팽의 최상의 작품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종종 지적되어 온 것이지만 그의 협주곡에 씌어진 오케스트레이션은 아주 평범할 뿐 아니라 명백하게 결점까지 포함하고 있다. 쇼팽이 관현악법에 매우 서투른 작곡가였다는 사실은 당대의 많은 음악인들이 잘 간파하고 있었는데, 특히 베를리오즈 같은 작곡가는 그 부분에 대해서 쇼팽을 혹독하게 비난했던 음악가로 잘 알려져 있다. 베를리오즈는 쇼팽의 관현악 반주부분을 썰렁하고 사실상 쓸모없는 것이라고 단정해버렸다. 베를리오즈 같은 관현악 대가의 시각으로 본다면 쇼팽의 오케스트레이션은 그런 혹평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가 쇼팽을 옹호할 방법은 없을까? 사실 쇼팽이 관현악 반주에 충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오로지 피아노 음악에만 몰두했던'피아노의 시인'은 정식으로 관현악법을 배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오케스트레이션의 약점을 포함하고 있어도, 두 작품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런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후배 작곡가들은 아름다운 작품을 보다 완벽한 형식으로 즐기기 위해 쇼팽의 원작에 손질을 가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이른바 평본(critical edition)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 평본들 가운데는 독일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클린트보르트(Klindworth, Karl 1830-1916)가 쓴 F단조 협주곡 편곡판과 타우지히(Tausig, Karl 1841-1871)가 쓴 E단조 협주곡 편곡 버전이 특히 유명하다. 클린트보르트의 F단조 편곡판은 피아노독주부까지 확장시켜 보다 큰 스케일의 음악으로 만든 것이고, 타우지히의 E단조 버전은 오늘날 즐겨 연주되는 대표적인 판본이다. 그 외 발라키레프가 2악장 로망스 부분만을 독주 콘서트버전으로 만든 것도 있다. 물론 이들 후대 작곡가들의 편곡 작업으로 쇼팽 오케스트레이션의 약점은 상당부분 보완되었는데, 사람들은 보다 튼튼한 구조와 형식을 갖추고 다시 태어난 그 평본 협주곡들을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쇼팽의 원래 작품이 지닌 소박한 맛을 즐기려는 욕구도 끊이지 않았고, 따라서 원곡대로 연주하는 일도 꾸준히 이어졌다. 쇼팽의 관현악 쓰기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사실 베를리오즈 같은 유능한 관현악 작곡가의 눈과 귀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쉽게 판단내릴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정격음악에 익숙해진 현재의 우리는 관현악부의 내용이 상당히 축약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서 너무 예리한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그렇게 간결하고 아담한 오케스트레이션이 쇼팽에게 있어서는 미적 필요에 의한 필연적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협주곡처럼 섬세하고 개인적인 성격의 피아노 독주파트를 가진 작품에는 그런 소박한 관현악 반주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은 아주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 차제에 원전 연주가 성행하고 있는 요즘 같은 때에 원본을 위한 변명의 차원에서 그런 견해도 충분히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음을 알아둘 필요는 있다고 본다. 더 힘을 내서 변론하자면, 솔직하게 말해, 쇼팽의 협주곡들에는 약점보다 장점이 훨씬 더 많다. 그 주도면밀하고 현란한 표현, 누가 들어도'풋풋한 청년기의 작품'이란 판단을 금방 내리게 하는 참신하고 싱그러운 낭만적 정서는 그의 원숙기 작품에서도, 또 그 시대 어떤 탁월한 작곡가들의 작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그러면 두 협주곡 작품이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구체적인 얘기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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