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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05년 06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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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40쪽 | 454g | 132*224*30mm |
ISBN13 | 9788937461217 |
ISBN10 | 8937461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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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묵혀뒀던 이 책을 기억해낸 것은 폴 오스터의 <어둠 속의 남자>를 읽는 중이었다. 이야기 속의 인물이 자신의 창조자라 할 수 있는 작가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는 이 이야기와 자살을 원하는 주인공과 자살을 허락할 수 없는 작가의 이야기를 다룬 우나무노의 <안개> 사이에 자연스럽게 다리가 놓였다고 할 수 있다. 전형적인 메타 픽션에 대한 충실한 예를 바로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나의 ‘전형적’이라는 단어에 우나무노 선생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겠지만 말이다.^^
체계화되고 정형화된 장르의 형식에 대한 회의와 소설도 인간의 삶처럼 시간과 공간 속에 노출되어 유기체처럼 성장하고 변화해가야 한다는 우나무노의 의지를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이 <안개>가 아닐까 한다. 장르에 의해 구분지어지고 틀 안에 갇히기를 거부한 혁명가적 글쓰기를 펼쳐 보인 작품이다. 우선 스페인어로 소설을 의미하는 ‘노벨라(novela)라 불리기를 거부한 우나무노는 자신의 이야기를 ’니볼라(nivola)라고 명명한다. 우리말 번역자는 ‘소셜’이라 번역했다. 그 안에 작가 스스로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허구적 인물과 실제 인물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유한한 존재인 인간으로서 불멸과 영원성에 대한 갈망을 꾀한다. 세르반테스나 세익스피어가 돈 키호테나 햄릿을 통해서 살아남듯이 말이다.
자, 그럼 ‘소설 구조를 혁명적으로 전복한 20세기 스페인 문학의 선구자’라 불리는 우나무노의 <안개> 속으로 들어가 보자. 우선 혁명적인 글쓰기의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이 책은 빅토르 고티라는 인지도 낮은 작가의 서문으로 시작한다. 보통의 경우 이름 있는 작가가 그렇지 못한 작가를 소개하기 위해 쓰는 서문의 전례를 깨는 것으로 시작한다. 게다가 <안개> 속으로 들어가 읽다보면 이 빅토르 고티라는 인물이 <안개>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인 즉 허구의 인물이라는 사실에 뒤통수를 맞게 된다. 고티의 서문에 이어 능청스럽게 시침 뚝 떼고 우나무노의 서문이 이어진다. 고티의 의견으로 인한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면서 고티의 목숨은 자신의 손 안에 있다며 조용히 으름장을 놓는다. 빅토르 고티의 실체를 앍고 보면 정말 살떨리는 협박인 셈이다.^^ 이 소셜의 에필로그는 아우구스토 페레스의 애완견이었던 오르페오가 맡았다. 보편적 소설의 끝부분에 주인공들의 후일담을 소개하는 관례를 깨고 이 소셜에서는 죽음을 맞이한 아우구스토 페레스를 제외한 남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겠다고 공표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아우구스토의 순수한 사랑을 조롱한 두 남녀 에우헤니아와 마우리시오의 댓가를 치루는 결말을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말이다. 서문과 에필로그만을 두고는 ‘혁명적’이라는 단어에 미흡하다. 아우구스토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사실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순수한 아우구스토의 사랑이야기는 지루하고 진부하다. 예술혼을 불태우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부모가 남긴 빚을 갚기 위해 직업적인 피아니스트로 일하는 에우헤니아를 스치듯 본 이후로 아우구스토는 사랑에 빠져서 그녀에게 한결같은 구애를 하게 된다. 하지만 에우헤니아에게는 마우리시오라는 애인이 있다. 천성적으로 게으른 마우리시오는 결혼을 요구하며 취직하기를 바라는 에우헤니아에게 순간만을 모면하며 단지 붙어있을 뿐인 한심한 인간이다. 아우구스토는 빚 때문에 끔찍하게 싫어하는 피아노를 치는 에우헤니아에게 순수한 의도로 그녀의 빚을 갚아주고 집을 그녀에게 돌려주지만 아우구스토의 진심은 에우헤니아에게 오해를 불러오게 된다. 백수 애인과 결별하고 아우구스토의 진심을 이해하는 듯한 모습으로 아우구스토와의 결혼을 허락한 에우헤니아는 결국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한심한 마우리시오와 도주를 하며 아우구스토에게 절망을 안겨준다. 실연의 아픔과 무엇보다 조롱당한 듯한 모멸감으로 괴로워하던 아우구스토는 자살을 결심하게 되고 자살에 관해 인상적으로 다뤘던 우나무노 선생의 수필을 떠올리고 살라망카로 우나무노를 찾아온다. 야릇한 미소로 아우구스토를 맞이하는 우나무노는 자살을 실행하려는 문제를 상의하러 자신을 찾아온 아우구스토의 속내를 꿰뚫으며 아우구스토는 절대 죽을 수 없다는 충격적인 비밀을 들려준다. 아우구스토는 살아있지도 그렇다고 죽은 존재도 아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다는 대답이다. 아우구스토는 우나무노의, 혹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환상의 산물일 뿐인 소셜 속의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아우구스토와 우나무노 사이의 설전이 오가고 오히려 허구의 실체인 아우구스토가 자신에게 허구의 존재를 부여한 우나무노를 죽이겠다는 협박에 흥분한 우나무노는 아우구스토가 죽도록 결정하고 선고를 내린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죽을 것이라는 끔찍한 선고...다시 살기를 간청하는 아우구스토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우나무노...집으로 돌아온 아우구스토는 우나무노의 선고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소설가이면서 14개 언어에 능통한 석학이면서 철학자이기도 한 우나무노의 철학적 사유가 이야기 속에서 시도 때도 없이 불쑥거린다. 햄릿이 환생한 듯한 우유부단한 사색가 아우구스토에게 색깔을 입혀주는 데 아주 그럴 듯한 옷이 된다. 존재 의지와 불멸에 대한 갈망은 아우구스토의 입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러니까 허구의 실체인 나는 죽어야 하는군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저를 창조해 주신 우나무노 선생님, 당신도 역시 죽을 것입니다. 당신 역시도 원래 있었던 무의 세계로 돌아갈 것입니다. 신은 당신을 꿈꾸는 것을 중단할 것입니다.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 네, 비록 원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죽을 거예요. 그리고 내 이야기를 읽는 모든 사람들도 죽을 것입니다. 모두가, 모두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나와 같은 허구의 실체들! 나와 똑같이! 모두가, (292쪽)
나는 이제 다른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내 생애의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만일 내가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환상 속에서 산다면 단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허구적인 삶의 이야기가 저장되어 있는 책 페이지에서 뛰쳐나와, 아니 나의 생애를 읽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에서--지금 이 순간 내 생애를 읽고 계시는 독자 여러분의 --뛰쳐나와 영원한 영혼으로써 영원히 고통 받는 영혼으로써 내가 왜 존재할 수 없단 말인가? 왜? (294쪽)
이 작품은 1914년에 출간된 작품이다. 현재의 소설들에 비하면 파격이라고 할 수 없을지 몰라도 당시만 해도 ‘전복’이나 ‘혁명’이란 단어가 튀어나올 만큼 획기적인 선구자였을 법하다. 포스트모더니즘, 메타픽션, 상호텍스트성, 하이퍼텍스트...뭐라 부르든지 간에 보르헤스나 마르케스, 존 파울즈, 오르한 파묵, 밀란 쿤데라, 폴 오스터 등과 같은 작가들에 의해 자주 쓰이는 이 기법이 시대가 원하는 자연스런 변화였을지라도 우나무노에게 빚지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아우구스토 페레스를 통해서 우나무노를 기억하는 것으로 일부의 빚을 탕감 받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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