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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발행일 | 2002년 02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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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10쪽 | 180g | 크기확인중 |
ISBN13 | 9788971847862 |
ISBN10 | 89718478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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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詩는 어렵기만 하다. 시를 보면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실려있는 시를 해부한 것과 같이 분석하고, 단어 하나하나가 의미하는 것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냥 음미하면서 읽으면 되는 것을.. 그 단순한 진리를 알게 된 후에도 마음에 드는 시 한두 편을 읽어보는 것으로 끝이지, 시집 한 권을 두고두고 읽는다는 것은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집에 시집이 서너 권 있지만, 그 시집에 실려있는 시들은 목적시가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한,두 편 읽어보면 곧 손에서 내려놓기 일쑤였다. 그러다 얼마 전, 이 시집을 샀다. 내가 유일하게, 내가 보기 위해 두 번 산 책이기도 하다. 나도 하루에 한편씩이라도 시를 한번 읽어 보겠다고..
내가 류시화 시인을 처음 알게 된것은 90년대 초반이지 싶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희망이 사그라들고, 가슴속에서 무엇인가를 내려놓아야 할때, 시린 가슴을 달래주던 것이 그의 시였다. 어디서 처음 보았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그의 시를 생각하고 아직도 가슴속에서 떠나 보내지 못한 사람을 많이도 생각했었다. 그때만 해도 조금은 센티 해지고 싶은때도 있었으니까.. 아직 청춘은 끝나지 않았다고 발버둥칠때 이니까..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
시집을 펼쳐 들고 한편, 한편 읽는 그의 시 속에서 아픈 기억이 그대로 묻어난다. 아직도 그것은 진행형인가보다. 마음 굳게 먹고 뒤돌아보지 말자고 맹세했지만, 아직도 나는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때때로 뒤돌아보며 세월들을 돌이킬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차라리 내가 새였다면, 그래서 뒤돌아볼 때 목이 꺾였다면 가능했을 텐데..
여름날 장마비가 무섭게 쏟아지면, 가을날 노란 은행잎이 보도를 덮을 정도로 쌓이면, 그리고 겨울이 되어 첫눈이 내릴 때면, 나는 아직도 그 옛날 소년과 소녀를 떠올리며 그들이 수줍게 거닐던 그 길들을 잊지 못한다.
장맛비에 온몸을 내맡긴 체 서대문 로터리를 걸어가던 소녀의 비에 젖은 모습을, 은행잎으로 노랗게 물감을 칠해 놓은듯한 봉은사 길을, 그리고 첫눈이 오는 날 만나서 같이 올라가자고 굳게 다짐했던 남산 그 계단 길을, 나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 올릴 수 있다.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물방울로 만나 물방울의 말을 주고받는
우리의 노래가 세상의 강을 더욱 깊어지게 하고
세상의 여행에 지치면 쉽게
한 몸으로 합쳐질 수 있었다
사막을 만나거든 함께 구름이 되어
사막을 건널 수 있었다
- 우리는 한때 두 개의 물방울로 만났었다 -
그 당시 우리는 우연이 많았다. 우연은 필연이 되고 필연은 숙명이 된다는 것을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시절, 방과후 집에 가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던 그 길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광화문 그 정류장에서, 그리고 아현동 고갯길 화실 앞에서 소년과 소녀는 시도 때도 없이 마주쳤다. 무언가 할말은 있었을 텐데, 그저 만난 것이, 서로를 보고 있다는 것이, 점점 필연으로 그리고 숙명으로 되어 간다는 것이 즐거워, 눈으로 서로의 시선만을 쫓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룻밤에도 수만 번씩 되뇌던 그 말을,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하고 말리라던 그 말을 소년은 끝내 소녀에게 건네지 못했다. 다만, 마음속으로 하는 그 말들을 소녀가 알아들었으리라 혼자서 상상하기만 했다. 필연이기에, 숙명이기에..
너의 눈에 나의 눈을 묻고
너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묻고
너의 얼굴에 나의 얼굴을 묻고
말하렴, 오랫동안 망설여왔던 말을
말하렴, 네 숨 속에 숨은 진실을
말하렴, 침묵의 언어로 말하렴
- 여섯 줄의 시 -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 불현듯 찾아온 만남에, 이제는 어긋나 버린 필연 앞에서 아줌마와 아저씨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그 옛날 소년과 소녀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마셔도 정신은 말똥말똥 해지는 가운데, 그때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서로의 시선을 쫓고만 있었다. 마음속에선 찬바람이 횡 하니 불고, 가슴은 소금을 뿌린 상처마냥 시리어 가기만 한다.
비 그치고
나는 당신 앞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내 전 생애를 푸르게, 푸르게
흔들고 싶다
푸르름이 아주 깊어졌을 때쯤이면
이 세상 모든 새들을 불러 함께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비 그치고 -
이제는 어른이 되었다고,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해보겠다고 이곳 저곳 헤 메고 다니지만, 서로가 생각나는 그곳은 무언의 약속을 한 것 마냥 비켜간다. 그리고 아직도 남아있는 상처 딱지를 발견하곤 그냥 못본척 한다. 헤어지면서 하는 악수가 힘이 없다. 그래도 이제는 어느 쪽 하늘을 쳐다봐야 할지를 알게 되었기에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쉰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쓰고서 다시 읽어보니 청승 맞다는 생각만 들지만, 그래도 시집을 읽고서 처음 써본 리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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