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A KİTAP :: Orhan Pamuk
인터넷을 하다보면 수많은 [표절작] 들을 보게 된다. 누군가의 블로그 꾸밈이 예뻐 그대로 따라 쓴다든가, 업로드 된 사진의 이국감에 반해 같은 기종, 같은 장소, 같은 각도로 찍어 본다든가, 기발한 UCC에 자극 받아 패러디란 치사한 명목으로 대량 카피 한다든가, 출처도 불분명한 이미지 밑에 어딘가에서 스크랩한 아포리즘을 꾸며 놓는다든가, 타인이 소유한 목록을 자신의 위시 리스트에 슬쩍 끼워 넣으며 타인의 공간을 그 존재의 장소로 인지하기 이전에 하나의 카탈로그로서 활용한다.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서 타인의 생각을 훔쳐 보는 것임에도, 타인을 따라하는 것에, 타성적이고도 반복적인 덮어 씌우기에 점차 [자신] 은 소멸 되어 간다.
비단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On-line)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OFF된 세상에서는 오히려 더 처절하고 치열하다. 누군가 하기 때문에 진학을 결정하고, 누군가 하기 때문에 통장의 규모와 아파트 평수를 걱정하고, 누군가 하기 때문에 노후를 설계해야 한다. 자신의 의지가 타인의 의지인지 불분명 해지고, 타인의 꿈이 자신의 꿈인지 확신하기 어려워진다. 온전히 나로서 갖고 있는 것을, 머물러 있는 것을, 여태까지 쌓아온 것을 매일 같이 부정하고 결핍감을 호소하며 더 나은 것을 갈망 해야만 한다. [무리] 에 끼길 혐오 하면서도, 자신만의 표현 이라고 앙칼지게 소유권을 주장 하면서도, 그 안에 있는 것이 과연 [진정한 나] 라고 소리칠 수 있을까?
가까운 친척이자 저명한 칼럼니스트인 제랄을 순수하게 동경하며 안온한 삶을 살았던 갈립은 어느날 자신의 아내 뤼야(꿈 이라는 의미)가 사라지는 사건에 부딪히게 된다. 그녀가 남긴 흔적들 속에서 그녀가 갈만한 곳을 추리하며 점차 갈립은 아내가 자신보다 더 나은 이상을 바랬다는 것을 감지하고 비로소 자신의 이상이었던 제랄과 그녀가 동반 실종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제랄의 칼럼 속에 그들이 갈만한 실마리가 숨어 있을 거라고 판단한 갈립은 그가 쓴 모든 글들을 샅샅이 읽고 그 칼럼이 제공 되었던 사건, 장소,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한다. 그 과정 속에서 갈립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믿고 영웅으로 여겼던 제랄의 허와 실을 파악하고, 그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이 제랄이 되어, 그와 그의 글을 창조하며 살아가기로 마음 먹는다.
파묵은 글쟁이로서, 자신이 아무리 글자를 새롭게 조합해도 그것이 선대 글쟁이들의 영향을 받은 모방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조하며 [인정 받는]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작위적이고(1부 p153) 읽는 독자에 따라 자기 해석적인지, 열렬한 독자의 피드백이 황홀 하면서도(2부 p177) 그 일방적인 책임 전가가 얼마나 타성적인지를(2부 p211) 한탄하며 토로한다. 그러나 그 모든 딜레마를 벗어날 수 없다면 개인 하나하나가 [크리에이티브] 로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대한 작가] 로서 사소한 사물 하나를 재해석 하고 표현 하는 것만이 타자를 통한 진정한 [자기 창조] 임을 역설한다.
동시에 그는 터키인이자 이스탄불 시민으로서, 자국의 다채로운 문물을 [일상의 비참함(1부 p183)] 으로 여기고 새로운 서양 문물을 흡수하고 카피하는 터키인들에게, 아니 어쩌면 글로벌 이라는 허울 좋은 부제로 스스로의 고유성을 포기해 가는 곳곳의 민족들에게 풍부한 역사적 지식을 근거로 나열하며(2권 p281) 경고한다. 지하 동굴에 묻힌 수많은, 먼지를 덮어쓴 터키 마네킹들은 터키인들의 자화상이자 우리네의 닮은꼴이다. 우리네 유산을 시시해 하다 못해 분통을 터뜨리며(1부 p197) 검증 받지 못한 외제를 찬양하고 갈데 없는 박탈감을 해소할 무언가를 기다리며(1부 p255) 초조해 하는 것은 어디 터키만의 일인가? 너무 많은 의미가 쏟아져 나와 난감할 지경이라고 너스레를 떠는(2부 11장) 그의 이스탄불 사랑에서 우리는 또 그 이국 문물을 상상하고 동경하는 것에만 그치고 말 것인가?
이 책은 문화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자 자아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고, 또 다른 이야기를 생산해 내는 끝없는 블랙홀 같은 책이다. 난해하고 어지로운 [매직아이북] 이지만 가까이 들여다 보면 오히려 윤곽이 보이지 않듯이(1부 p138), 조금은 거리를 두고 실눈으로 바라보면 한가지의 의미도, 두가지의 의미도 (2부 p124) 있는 그대로 까다롭지 않게 읽어낼 수가 있다. 거기에 글자의 힘, 크리에이티브의 힘, 그 [신비] 를 깨달은 독자는 이 책에 영향을 받아 또 글을 쓸 것이다. 시시한 사물이 생명력을 띠고, 온갖 의미와 이야기를 담은 텍스트로서 읽혀지고, 그 창조 작업으로서 독자는 [작가] 가 되어간다. 모방자(1부 p143) 파묵(제랄)을 동경한 우리는 제랄의 인생을 사는 갈립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한창 독서하기와 글쓰기에 회의 하고 있던 중에 이 책을 읽게 되어 개인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갈립의 친구 사임처럼(1권 p109) 닥치는 대로 서적과 자료를 수집하고, 제랄과 갈립처럼 [읽는] 것에 집착하고(2부 p54), 에펜디 왕자처럼(2부 p267) 작가들의 어구를 내 지식인 마냥 인용하기에 급급했다. 하다못해 이런 책 감상문조차 [좋은 글] 쓰기에 연연해 좀더 나은 아마추어 글과 자신의 글을 비교하며 쓸데없이 좌절하고, 읽히고 뽑힐 글을 위해 작위적고도 통속적인 문장을 조합하기도 했다. 그 위화감을 못견뎌 자신만의(라고 착각하고픈) 솔직한 표현을 드러내면,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문장에 장인 베디의 마네킹 마냥(1부 p100) 무시 당하는 수모를 감내 해야 했다. 나는 사실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사람(2부 p60)에 해당되는 건 아닌가 하며 스스로를 아파했다.
그럼에도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타인의 꿈에 나를 맞춰야 한다는 현실에 쫓기며(1부 p121) 나와 같은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할 수 있다는(1부 p149, p156) 자기 최면적 용기를 위안 삼아, 내가 살아온 삶을, 생각을, 내가 있는 곳을, 그 모든 것을 표현해 내고 드러 내려고 한다. 설령 타인에게 보여지는 [눈]을 의식하고(1부 p171), 그것으로 또 고통 받고 깨진다 해도, 그럼으로 인한 변태는 그전의 순수한 나는 아니더라도 내가 되고자 하는 [그]가 됨으로, 그 순간에 다다렀을 때, 그것이 진정한 나임을 깨닫고 받아 들이게 될 것이다. (2부 p135) [황량한 사막의 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 사이의 바위, 아무도 보지 않는 계곡의 나무(2부 p283)] 가 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고립] 이 됨으로 나자신이 된다는 패러독스를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선(line)위에서, 지금의 자신을 표현하라. 더 가지려 하지 않는, 더 가지고 있지 않는, 언제나 모자른 자신을 표현하라. 표현 못할 병을 가졌다면 기꺼이 선대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으라. 모방은 잘못된게 아니다. (1부 p220) 그들의 습득을 겸허히 참고하고 배우라. (1부 p130) 보는 것은 또한 타인을 이해 하는 것이다. 설령 되고 싶은 자신이 타인에게 이미 있다 하더라도 시기와 성급함으로 내것을 없애지는 말라. 그 딜레마의 사이에서 표현의 [신비] 를 깨우치라. 모든 글의 소재는 자기 자신 안에 있다. 개인의 인생만큼 경이로운게 또 있을까. 그것을 표현해 내는 글쓰기 말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