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도로 경험되는 중국의 근대
이 책이 주목하고 있는 중국 근대의 일상 중 하나는 ‘인력거꾼들의 이야기’이다. 특히 조계 안에서 ‘인력거’를 끌던 ‘인력거꾼’들은 사람들이 더 이상 도보로 느리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이동하길 원했음을 말해 준다. 근대의 속도는 풍경을 하나의 파노라마로 만들어 내며, 이동의 자유를 확보한 근대의 인간들은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니기를 원한다. 이로 인해 근대 서양은 유럽 안에서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팽창을 요구했다. 근대 자본주의는 속도의 생성으로 인해 서구 유럽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 뻗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근대에서도 역시 속도와 이동은 중요한 문제였다. 이들에게 움직임은 근대의 문물들과 얽혀 전통 시기와는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낸다. 과거시험 공부를 위해 3년간 밖에 나가보지 못했다는 한나라의 동중서의 이야기는 이제 웃음거리가 되고(본문 p.333) 유학을 가는 학생들이 새로운 지식인으로 등장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 역시 속도와 이동이 주는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들은 상해 조계의 신문물이었던 인력거와 외발수레를 통해 삶을 유지했고, 근대 문물에 매혹당한 이들은 그 속도를 즐기기까지 했다. 이제 인력거와 마차가 만들어 내는 속도는 향유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인력거와 마차는 허용하지만, 철로 건설에는 반대한다. 화보와 사진 속에서 드러나는 철로 건설에 대한 공포의 이미지들은 중국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빠른 속도와 이동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음을 보여 준다. 이들에게 철도는 근대의 신문물이기도 했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이기도 했고, 당시의 지리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는 폭력적인 근대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게다가 빠른 이동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계층에 상관없이 인력거꾼으로 나서야 했던 당시의 현실은 서구의 근대가 중국인들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또한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 서양화된 공간 조계와 근대적 도시의 출현
서구 열강의 침략 초기, 중국은 오히려 자신들이 제국의 중심임을 설파했지만, 거듭된 전쟁 패배와 서구 근대 문물의 유입은 자신들을 국제법 질서에 편입하게 만든다. 이 사실은 중국이 더 이상 제국의 중심이 아니라 세계의 한 부분으로 ‘전락’했음을 말해 준다. 이런 정치체제의 변화는 그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도 변화시킨다. 제국의 중심으로 재편되었던 공간이 해체되고, 자본주의화된 도시들이 등장한다. 이런 중국의 도시들은 상해의 ‘조계’(租界)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해는 내륙과 바다를 연결하는 주요 거점 지역이자 서구 문물이 직접적으로 전해질 수 있었던 매개체로서, 이곳을 통해 중국은 차츰 서양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계는 개항 도시의 외국인 거주지를 뜻하는 말이었지만, 외국인들이 직접적으로 자신들의 문물을 수입해 오는 곳이었고, 중국이 전쟁에 패배할 때마다 늘어난 탓에 나중엔 중국에 속해 있지만 중국이 아닌 곳처럼 변모한다. 이렇게 수입되는 근대의 문물들은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유지하던 평범한 중국인들의 삶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다.
새롭게 재편된 자본주의화된 도시들로 인해, 이제 중국 근대인들의 삶에는 도시문화라는 것이 생겨난다. 북경·상해 등 인구가 밀집된 지역을 중심으로 질서 정연하게 구획된 도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공원과 경마장, 즐비하게 늘어선 기방, 경극·서커스 등의 다양한 공연문화 등이 형성된다. 얼핏 보면 지금과 다를 바 없는 도시문화는 근대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관념을 심어 준다. 다름 아닌 숫자와 시간에 대한 관념이다.
▶ 숫자와 시간 관념의 형성
소농 생산 중심의 중국 농촌 지역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절기에 의해 움직였을 뿐,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시간 관념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근대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자본주의는 숫자와 시간을 그들의 삶을 형성하는 제1원리로 만든다. 특히 산학(算學)은 자본주의와 연결되어 근대를 살아가기 위해선 그것을 모르면 살 수 없다, 라는 절박함까지 만들어 낸다. 이로 인해 산학은 새로운 학문으로 부각된다. 이는 그저 새롭게 탄생한 학문 분야가 아니었다. 형이상학적 사유와 관념에 익숙한 전통적인 중국 지식인들에게 저항감을 줄 정도로 이질적이었지만, 시간 관념과 숫자 관념이 유입되기 시작한 근대인들에게는 효율의 욕구를 추동하는 학문이었다. 이제 산학은 시간과 숫자에 따라 일상을 분할하게 하는 시간표를 만들게 했고, 근대적 개인의 삶을 그에 맞춰 규율하게 만드는, ‘근대’ 그 자체가 된다.
<중국 근대의 이면들, 여성과 타자>
정치제도나 경제제도 혹은 사상을 분석한 책 안에 평범한 중국의 기층민중들이 들어갈 자리가 있었을까? 오히려 거시담론에 가려진 비가시적 존재였다는 말이 더 타당할 것이다. 『중국 근대의 풍경』의 주인공들은 직접적으로 서구 근대 문물과 대면해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이다. 전족 안에 갇혀 있던 여성, 조계에 비해 낙후된 자신들의 문물을 보며 스스로를 타자화해야 했던 지식인들, 교육제도의 변화로 인해 달라진 문화에 적응하거나 혹은 저항해야 했던 학생들. 그리고 ‘중국 근대의 풍경’ 속에서도 타자로 자리매김해야 했던 영국 식민지령 인도인 순포의 모습을 살피는 것은 이 책이 갖고 있는 의의를 좀더 풍성하게 만든다.
▶ 남성적인 근대, 근대 속의 여성
근대 시기의 여성 지식인들은 이동의 자유를 위해 전족을 풀고, 남장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남성성으로 구축된 근대 문화의 주체로 참여할 수가 없었다. 기존의 사회도 가부장적이었는데, 왜 근대가 더 문제가 되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전통 시기의 여성들은 아예 드러나질 않았다. 남성들은 그들만의 사회를 만들었고, 부인 아니면 기녀로 그들이 생각하는 여성을 형상화했다. 그렇다면 근대는 어떠했을까? 근대는 얼핏 보기에 여성들의 참여를 허용하고 그들을 자신들의 사회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세련된 방법으로 여성들의 사회 참여를 배제했다. 오히려 근대 시기 중국은 서양과 다르지 않게 여성의 평등과 자유를 말하는 것 같았지만 여성들에게 그들의 질서에 편입해야만 근대 문화의 주체로 설 수 있음을 강요했다. 자주 등장하는 신해혁명의 여성열사 추근(秋瑾) 이야기는 근대 문화의 남성적 측면을 잘 드러낸다. 그녀는 여성의 해방을 주장하는 지식인이었고, 신해혁명을 주도한 인물이었지만, 그런 활동을 하기 위해 자신의 젠더(Gender)를 여성이 아니라 남성으로 구성해야만 했다.
근대 지식인 여성들이 남성성으로 자신을 포장해야 했다면, 중국 근대의 새로운 여성이었던 ‘여공’들은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들은 계층과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이 상품으로 기능하기를 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노동력을 가지고 편입한 여성들이다. 비일상적으로 섹슈얼리티(Sexuality)를 판매하던 기녀와 달리 일정한 임금이 보장되었기에,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이자 주체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도 남성 공장장에 의해 그들의 노동을 통제당했고, ‘여공’이 되는 것도 그들의 품행을 평가하는 남성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본문 p.398)
이런 사실들은 근대가 남성성으로 구축되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들이다. 특히 법률문화 속에서 드러나는 여성들은 여전히 가부장제 질서에서 한 발짝도 나서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가정 안에서 여성에 대한 사적인 형집행을 허용하는 장면들이 『점석재화보』에 자주 등장한 것만 보아도 중국의 근대가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질서를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 타자에 대한 중국 근대의 이중적인 시선
그 당시 중국에는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서구 열강으로 대표되는 본받아야 하는 타자와, 도깨비와 야만인으로 형성되는 ‘아시아’라는 타자, 이렇게 서로 다른 두 타자의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었다. 근대 중국은 이런 두 타자의 이미지로 인해 타자화를 만들어 가는 방식도 이중적이었다. 서구 열강 앞에서는 스스로를 개화하지 못한 후진국으로 드러내고,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 앞에선 중국이 좀더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이는 중국의 근대가 서구 열강의 시선을 내면화하면서 이루어졌음을 말해 준다. 서구를 극복하려던 근대 중국은 그들을 닮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이미지는 여전히 서구가 만들어 낸 형상에 갇혀 있다. 당장 우리에게도 중국은 낙후되고, 근대화되지 못한 이미지와 함께 폭발적인 잠재력을 가진 시장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이는 100년 전에 서구 열강이 가졌던 ‘더럽고 지저분한 곳, 그렇지만 언제 깰지 모르는 잠자는 사자’라는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표상체계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 주는가? 여전히 우리는 서구의 근대 안에 갇혀 서구가 만들어 낸 이미지들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고, 근대 중국이 경험했던 이중의 타자화를 우리도 고스란히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