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동아시아를 향한 대항해<br/>2장 지단, 우주에 대한 책임을 잠시 포기하다<br/>3장 아비규환<br/>4장 16강, 명승부와 졸전의 이중나선<br/>5장 8강을 넘어 4강까지<br/>6장 호나우두의 재래, 브라질의 매혹<br/>7장 환골탈태, 또 하나의 행성<br/>8장 한국 축구, 우주의 행로를 뒤바꾸다<br/>9장 축구장을 보호하라

여름 한때 월드컵 경기를 보느라 줄기차게 응원무리를 쫓아다녔다. 잠실로, 과천으로, 시내로, 표를 구하고 자리를 부탁하며, 많은 이들이 그랬듯 나 역시 월드컵의 열기에 푹 빠져 있었다. 물론 '2002 월드컵'을 맞기 전까진 축구라는 경기에 대한 내 관심은 지극히 미비한 것이어서 '축구란 골키퍼를 피해 상대편 진영에 공을 가져다 넣는 지극히 단순한 운동' 정도의 덜 떨어진 인식밖에 없었다. 수천 가구가 들어찰 만큼 넓은 운동장을 공 하나 잡으려 죽어라 뛰는, 저 지루하고 투박한 경기를 대체 무슨 재미로 끝까지 지켜본단 말인가.

그러나 지난 6월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경기소식에 쫑긋했고, 지단, 피구, 히바우두, 토티, 칸, 등 세계적 선수들의 프로필을 찾아보기 바빴다. 수시로 월드컵 가십들을 찾아 읽었고, 부지런히 기사를 퍼다 날렸다.
일시적 관심이었고 휩쓸림이긴 했지만, 월드컵 기간 축구는 내 생활의 활력소였고 즐거움이었다. 감격해 눈물을 흘리는 친구와 부둥켜 안고, 처음 본 옆사람과 친밀히 음료수를 나누어 마실 수 있던, 그 많은 인파를 뚫고 기꺼이 응원에 동참했던 열정. 누구보다 게으르고 무심한 내가 그렇게 월드컵에 열심일 수 있었던 건 무슨 이유었을까. 다소 과장되었지만 흥분되어 벅찬 한 달 후 지금은 연기처럼 가물한 기억. 폭풍처럼 몰려와 광화문을, 아니 전국을 가득 메웠던 그 엄청난 기운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정윤수의 『축구장을 보호하라』는 월드컵의 거센 에너지, 그 뜨거움의 여운이 사라지는 시점에서 출간된 책이다.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발빠르게 쏟아진 여타 축구 관련 책보다 한 템포 늦게 나왔고, 따라서 관심에서 다소 밀린 아쉬움이 남지만, 근간에 출간된 월드컵 관련 책 중에서 가장 의미있고 흥미로운 책이 아닌가 싶다.

먼저 표지사진부터 눈길을 끈다. 4강의 기적을 이끌어 낸 히딩크 감독이나 대표선수들, 혹은 붉은 악마, 그도 아니면 세계적 스타선수 내지 화려한 스테디움 그 무엇과의 연관성도 없다. 월드컵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을 듯한 제3세계의 한 소년- 표지설명을 보니 아프가니스탄의 한 소년이다. -이 천진한 표정으로 축구공을 꼭 안고 있다. 소년은 무슨 생각을 하며 웃고 있을까. 그리고 소년을 통해 이 책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축구 다큐멘터리'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6월 월드컵에 대한 기억을 차례로 훑는 가운데 축구 언저리의 다양한 모습과 정보를 기록했다. 그러나 되새김질하듯 근간의 월드컵 관련 언론보도와 가시적 현상만을 상투적으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생명력으로 탄생한 축구, 그 자체를 좇으며, 문화적 코드로서의 축구를 인간의 삶 속에 깊숙히 투영시킨다. 월드컵 또는 축구가 갖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역사적, 무엇보다 축구 자체로서의 온전한 매력을 저자의 진지한 성찰과 해박한 지식, 독창적 이해로 풀어내고 있다.

지난 5월 국내 입국하는 해외 선수단의 모습을 환기시키며 저자가 곧장 화제로 꺼낸 선수는 프랑스의 지단이다. 너무 빨리 평가전을 끝내버린 바람에 축구 스타로서의 면목을 채 보이지 못하고 한국을 떠났지만, 프랑스 축구의 상징이라는 사명적 이미지 뒤로 그의 평탄지 않는 출신배경, 뒤얽힌 심리상태와 복잡한 입장 유추 속에서 그라운드의 영웅 이상으로, 사회적, 정치적 위치까지 관심의 영역을 확대시킨다.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수십만부의 자서전까지 팔아치웠다는 슈퍼스타 베컴이, 귀족적인 영국사회 속에서 어떻게 대중문화의 코드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지, 축구를 그 이상의 변주로 끌어올린다.

저자는 브라질, 스페인, 프랑스 등 최강국의 축구열풍, 사회,문화적 분위기, 제반 상황들을 속속들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화려한 축제 월드컵에서 소외된 주변 변방국의 축구와 삶도 빠뜨리지 않는다. 축구가 거세된 에너지에 대한 욕망이고 행복한 놀이라 한다면, 화려한 슈퍼스타의 축구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피폐한 현실을 살아가는 소년의 축구공에도 관심을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히딩크, 정몽준, 스타선수들의 거창한 꿈을 세상의 우연에 맞기어 둘지언정 저 참혹한 전쟁터 속을 살아가는 아이의 소박한 공놀이와 꿈은 우리가 함께 이루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박애적 의지마저 내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독재의 압박을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축구장을 원초적 의미이기도 한 순수한 에너지으로서의 축구장, 희망으로의 축구장으로 고스란히 지켜내야 한다는 당위로 이어진다.

저자는 지난 6월의 감동을 뜨거운 애국심이나 시민단결의 힘으로 보는 상투적 주장이나 혹은 똑 같은 복장에 똑 같은 구호를 외치는 파시즘의 광기와 비슷한 그 무엇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모두 거부한다. 오히려, 그것은 우울하고 폐쇄적인 회로에서 벗어나 마음껏 거리를 쏘다니고 싶은 사람들의 순수한 열망이 아니었겠냐고 말한다. 여행을 떠나고 싶고, 일에 미친듯 몰두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기도 하고,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싶고, 욕을 하고 싶고, 한달 내 시집만 읽고 싶고, 아스팔트를 벗어나고 싶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월드컵'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질의 축제로 누렸다는 것. 여기에 '성숙한 시민의식'이란 말을 써야 한다면, 그것은 광장을 뛰어다니고 밤새 소리지르고 폭죽을 터뜨렸기 때문이지, 타인의 눈을 의식해 축제 후 쓰레기를 치우는 도덕적 강박증 때문은 아니었다는 것. 따라서 월드컵 응원의 열기가 불법선거 반대 캠페인이나 소파철폐를 위한 궐기 동참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순박한 기대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강박적인 열등감을 벗고 스스로의 욕망을 순수하게 분출하는 연습으로서의 월드컵을 탐색한다.

축구 칼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의 의미있는 성찰이 이 책을 다소 진지하게 이끌었다면, 그가 현장에서 보고 겪은 생생한 기억은 열정의 월드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경기 전 선수들의 인터뷰, 취재구역의 긴장된 움직임, 첫 휘슬을 부르고 나서 심판과 선수간의 팽팽한 신경전, 아름다웠던 황선홍과 안정환의 골 세레모니 등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지난 여름의 환희를 실감나게 되살린다.

또한 경기 때면 주술사의 힘을 빌리는 세네갈, 인기를 즐기는 이탈리아 선수들, 다양한 스타 선수들의 헤어와 패션, 선수들의 백넘버와 별명, 훌리건과 롤리건, 역대 월드컵 이변, 볼만한 스포츠 영화 등 재미있는 정보들 역시 놓칠 수 없는 재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