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필의 난(蘭)은 원래의 난초를 능가하나니
--- 글·류태형|월간 '객석' 기자 (mozart@gaeksuk.com)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 이렇게 적어놓은 음악회 프로그램이 있다면 오케스트라의 연주회가 분명하리라. 그러나 이것은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야마시타 가즈히토의 대표적인 '독주' 레퍼토리이다. 한 대의 기타라고는 믿기지 않는 광대한 다이내믹 레인지의 표현으로 그는 종종 비평가들로부터 '기타를 혹사시키는 연주자'라는 비판 아닌 비판, 찬사 아닌 찬사를 받곤 했다.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불리지만 악기 자체의 표현에는 한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야마시타의 연주를 듣다 보면 한계가 어디일까 궁금해진다. 오케스트라의 앙상블 뿐만 아니라,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이 만들어내는 디테일의 차이까지도 그의 손가락 안에서는 그대로 재현된다. 16세의 나이로 라미레스, 알레산드리아, 파리 국제 콩쿠르 등 주요 기타 콩쿠르들을 최연소로 휩쓸며 화려하게 등장한 이후 LP 시절부터 60여장이 넘는 음반 출반과 세계 각국을 돌며 연주 여행으로 바쁜 이 시대의 대표적인 클래식 기타리스트가 됐다.
야마시타는 1961년 나가사키에서 태어났다. 그해 봄에는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 조지 해리슨과 링고 스타, 이 네 명의 젊은이가 'The Beatles'란 명칭으로 '캐번클럽'에서 첫 데뷔 무대를 가진다. 비틀즈가 함부르크와 리버풀을 오가며 인기를 쌓아가던 그해 11월,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캐번클럽을 찾아간다. 다음 달에 엡스타인은 비틀즈에게 매니지먼트를 제의한다. 비틀즈가 4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의 가슴을 고동치게 하는 신화의 발판을 마련한 해에 야마시타는 태어난 것이다. 출생과 어린시절의 인연. 그래서일까.
"어려서부터 비틀즈의 음악을 즐겨 들었습니다. 비틀즈의 음악은 20세기 음악사를 통틀어 최고의 유산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001년 12월 영산아트홀과 LG아트센터에서 리사이틀을 가진 야마시타를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며 비틀즈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표시했다. 야마시타는 당시 바흐와 테데스코, 콤포스텔라와 티페트, 비틀즈 등의 레퍼토리를 선보이며 청중들에게 라미레스 기타의 마법을 걸었다. 그의 연주 중에서도 7곡을 연속으로 연주한 비틀즈 메들리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원래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 드럼과 마이크를 통한 보컬이 엮여서 만들어내는 비틀즈 사운드를 그는 자신의 열 손가락과 기타 만으로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웠다. 야마시타가 직접 편곡한 비틀즈 음악의 정수가 담긴 앨범이 1999년 10월 일본 가고시마에서 녹음돼 이듬해 크라운 레이블에서 발매된 바로 이 앨범이다.
야마시타는 비틀즈 음악을 편곡하는 데 있어 페이드 아웃되는 효과라든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뮤트 음까지도 정확히 재현해낸다. '옐로 서브마린' 같은 곡에서는 철썩대는 파도소리 등 곡 중간의 효과음을 기타로 그럴 듯하게 만든다. 이만하면 정말 설득력이 있다. 꼼꼼하면서도 명확하다. 명필은, 대상이 된 난초와 자신이 그린 난 중에 후자를 택하도록 하는 사람이다. 야마시타 가즈히토가 바로 그런 경우다.
연대기적 구성, 비틀즈 주옥편의 예리한 크로키
이 음반에 수록된 서른 여섯 곡의 '비틀즈 주옥편'은 완벽한 연대기적 구성으로 이뤄졌다. 귀만 맡기고 들어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비틀즈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곡의 윤곽을 정확히 꿰뚫어내 크로키를 구사하듯 하는 야마시타의 날카로운 시선이 한결같다. 그의 비범한 선곡을 한 번 살펴보자.
'Love Me Do', 'A Taste of Honey', 'P.S. I Love You'는 데뷔 앨범 'Please Please Me'(1963년)로 첫 선을 보였다. 이어지는 'All My Loving'은 같은 해 발매된 두 번째 앨범 'With The Beatles'에 수록됐다. 'She Loves You'는 1964년 싱글로 발매돼 단숨에 미국 차트 정상에 올랐던 넘버다. 'A Hard Day's Night', 'If I Fell', 'And I Love Her'는 같은 해 발매된 앨범 'A Hard Day's Night'에 수록됐다. 'Eight Days a Week', 'I'll Follow the Sun' 역시 1964년의 'Beatles for Sale' 앨범을 수놓았던 곡들이다.
다음으로 1965년에 발매된 두 앨범의 수록곡들이다. 앨범 'Help!'에 수록됐던 'You've Got to Hide Your Love away', 'Ticket to Ride', 'I've Just Seen a Face', 'Yesterday'와 필자가 비틀즈 최고의 진미가 담긴 명반으로 손꼽는 'Rubber Soul'의 수록곡인 'Norwegian Wood(This Bird Has Flown)', 'Michelle', 'In My Life', 'If I Needed Someone', 'Girl'이 이어진다.
야마시타는 차갑고 심오해지는 앨범 'Revolver'(1966)에서 'Eleanor Rigby', 'Here, There, and Everywhere', 'Yellow Submarine' 등 따스한 곡들을 골라냈다. 이어지는 1967년의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타이틀곡과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는 실험적이고 몽환적인 걸작을 대표하기에 충분하다. 'The Fool On The Hill',
'Penny Lane', 'Your Mother Should Know', 이렇게 세 곡을 선택한 'Magical Mystery Tour'(1967) 앨범은 '서전 페퍼'와 '화이트 앨범'이란 두 봉우리 사이에 끼인 작품이지만, 야마시타가 고른 세 곡은 아마도 예술성과 서정성 면에서는 두 앨범을 능가할 만하다. 특히 'Your Mother …' 앨범 전체가 끝나고 나서도 귓가에 오래 여운을 남긴다.
신나는 1968년의 싱글 'Lady Madonna'를 거쳐 비틀즈 앨범 중에서도 가장 독특하고 다양한 실험정신이 돋보였던 작품이었던 'The Beatles'(일명 '화이트 앨범', 1968)에서는 'Blackbird', 'I Will', 'Julia', 'Mother Nature's Son' 등 가장 낮게 읊조리고 가장 서정적인 작품을 골랐다. 같은 해 발매된 싱글 'Hey Jude'는 현재까지도 늘푸른 젊은이들의 앤섬이다. 1969년작 앨범 'Abbey Road'에서는 끝없이 청명한 하늘을 보는 듯 'Because'가 간택됐다. 그렇게 1960년대를 장식한 뒤 1970년에 발매된 마지막 앨범 'Let It Be'에서는 동명 타이틀곡과 'Across the Universe'가 전설이 된 비틀즈의 긴 여정을 장식하는 마지막으로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우리는 예수보다도 유명하다'고 한 존 레논의 문제의 발언으로 비틀즈의 앨범이 불구덩이 속에 던져지고 급격한 불매운동을 불러 일으켰지만 비틀즈의 보편성은 세기를 지나 계속되는 힘을 지녔다. 영화 '아이 엠 샘'이 소리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공감을 불러 일으켰던 데에는 영혼으로 연기한 숀 펜의 열연과 아역 다코타 패닝의 마력이 가장 큰 요인이였겠지만, 영화 내내 뮤직비디오 속 음악처럼 흘렀던 비틀즈의 카피 버전이 없었다면 그 감동은 얼마나 건조해졌을 것인가.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즈'는 최첨단 시설의 영화관에 울려퍼지며 21세기의 공기를 감동으로 훈훈하게 덥힌다. 야마시타 가즈히토의 세심한 명인기가 돋보이는 비틀즈 편곡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아련한 추억 뿐 아니라 위안과 감동, 살아있는 생활의 리듬을 선사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