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전화
센시니
바르셀로나의 야영장에서 야간 경비를 보다 잘린, 쥐 새끼보다 가난한 20대 청년이 한 문학 공모전을 통해 스페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아르헨티나 작가 루이스 안토니오 센시니와 연이 닿는다. (글쓰기가 아닌) 공모전에 정진하라는 다소 이상한 편지로 시작하는 이들의 서신 교환을 둘러싼 두 작가의 인연은 과연 어디까지 지속될까. 「공모전 사나이」로 거듭나는 이 문학 청년은 센시니를 쫓고, 우리는 이 청년을 쫓는다. 실제로 쿳사 재단이 후원하는 산세바스티안 단편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
앙리 시몽 르프랭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일어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실패한 작가이다. 파리의 저속한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지방 잡지에 시나 단편 나부랭이를 발표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 가는 작가라는 말씀이다. 원고를 보낼 때마다 퇴짜를 맞는 이 작가는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이후 자신의 영토(조국)가 어디인지 깨닫는다. 그가 발을 디뎌야 할 곳은 엉터리 작가들과 원한에 사무친 작가들, 곧 삼류 작가들의 땅인 것이다.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르프랭스는 단순한 운반이나 소규모 테러 등을 감행하며 글쟁이들을 돕지만, 이상하게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정의할 수도 없는 거부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르프랭스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삼류 작가라는 것을 끝내 인정한다. 동시에 일류 작가들도 삼류 작가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엔리케 마르틴
시인은 무슨 일이든 견뎌 낼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은 파멸과 광기와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엔리케 마르틴은 1953년생으로 카스티야어와 카탈루냐어로 시를 쓴 시인이다. 전력투구로 모든 의지와 노력을 쏟아 부으며 간절하게 시인이 되기를 열망했던 남자다. 고집스러운 집념, 까짓 거 다 덤비라는 기세로 친구에게 암호문을 작성해 보내곤 하던 그는 벽을 가득 채운 숫자들, 해독 불가능한 수식, 이어 다음의 한 마디를 남긴 채 자살한다. 「아는 자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소포 하나. 소포 안에는 2절지 크기의 종이 50장이 들어 있었다. 모두 손으로 직접 쓴 시 뭉텅이였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문학적 모험
작가 B는 알아볼 수 없게 가면을 덧씌워서 작가들을 조롱하는 책을 쓴다. A와 같은 특정한 유형의 작가들을 조롱하는 단편집이다. 그는 어떤 단편에서 동갑내기 작가 A와 엇비슷한 인물을 그려낸다. 무엇보다 명성을 얻었고, 다음으로 돈까지 쥐었고, 심지어 독자층도 두터운 작가 말이다. 명성이나 돈과는 거리가 멀고 삼류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는 B와 천양지차인, 성인군자인 양 점잔을 빼는 A의 글을 그악스런 독자인 B는 도저히 참아 줄 수 없다. B는 단편 중 하나에서 A를 이름을 바꿔 조롱하는데, A는 신문에 이 작품을 열렬히 칭찬하는 글을 발표한다. B의 책은 소리 없는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고, B는 A를 만나러 간다.
전화
B는 X를 사랑한다. 물론 불행한 사랑이다. X는 B에게 전화로 이별을 통보하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다. 어느 날 밤 B는 두 통의 전화를 거쳐 X와 통화하는 데 성공한다. 스페인 땅의 끝과 끝. B는 X의 도시로 향하는 기차를 탄다. 그리고 도착해서 사랑을 나누고, 돌보고, 떠나 달라고 요구받고, 떠나고, 다시 전화한다. 그리고 B가 앞으로 다시는 전화하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즈음, 어느 날 누군가 B의 집 문을 두드린다. 사흘 전에 스페인 땅 한쪽 끝에서 누군가 X를 살해했다고 한다. B는 다시 X의 도시로 향한다. X의 오빠를 만나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오고, 일주일 뒤 범인을 알리는 전화를 받는다. B는 덩그러니 홀로 남는다.
제2부. 형사들
굼벵이 아저씨
크리스탈 서점과 소타노 서점을 오가며 책을 훔치고, 오전 10시면 시내 영화관에서 조조 영화를 보곤 하던 내 이름은 아르투로 벨라노이다. 나는 아침이면 크리스탈 서점에 처박혀 책을 되작이다가 알라메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는 아저씨를 보았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나무 틈에 앉아 조용히 허공을 응시하는 아저씨의 모습은 하얀 굼벵이 같았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눈을 계속 뜬 채 담배만 뻐금뻐금 빨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서점 근처 공원 안쪽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볼라뇨가 실제로 멕시코시티에 살 때 자주 들렀던 서점들, 그리고 단편의 화자처럼 손버릇이 나빴던 청년 볼라뇨를 둘러싼 추억.
눈
나는 5년 전에 바르셀로나 타예르스 거리의 술집에서 그 친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친구도 이역만리 땅 칠레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깡마른데다 키는 똥자루만 하고 피부는 가무잡잡한 사내, 로헬리오 에스트라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칠레 공산당의 핵심 지도자 중 한 사람을 아버지로 둔 그는 1974년 정초에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에 도착. 체육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체육 교사가 됨. 로저 스트라다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사고를 치고 다닌 그는 어떤 운동선수 코치의 조수로 일하며 뒷돈으로 월급을 불렸다. 스포츠 도박, 마약과 매춘 알선에 몸담고 암시장과 유흥업소를 오가던 그는 모스크바 갱들과 어울리다가 보스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결국 보스를 죽인다. 우여곡절 끝에 바르셀로나로 건너와 사립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근무하게 된 그는 다시 창녀들과 몸을 섞고 술집을 드나든다. 그리고 밤이 되면, 러시아와 모스크바를 그리워한다.
또 다른 러시아 이야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전선에서 싸웠던 청색 사단 소속의 병사 이야기. 세비야 출신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러시아 땅까지 이르게 된 그는 자신을 일컫는 「코르체(신병)」이라는 단어를 「찬트레(성가대 지휘자)」라는 단어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정말로 성가대 지휘자가 된다. 이어 부상을 당해 군 병원에 입원했다가 엉뚱한 기차표를 지급받고 나치 친위대 파병 대대에 도착한 그는 러시아 병사들의 습격을 받는다. 그런데 고문 중에 그가 내뱉은 「코뇨(씨발)」이라는 단어가 「쿤스트(예술)」로 둔갑해 그들 귀에 들어가고, 병사는 살아남는다.
윌리엄 번즈
캘리포니아 주 벤투라 출신의 윌리엄 번즈가 소노라 주 산타테레사의 경찰 판초 몬헤에게, 몬헤가 다시 화자에게 들려준 이야기. 인생의 암울했던 시기에 윌리엄 번즈는 두 명의 여자를 따라나선다. 또래의 나이 지긋한 여자, 그리고 새파랗게 젊은 여자. 윌리엄 번즈는 산동네 변두리로 휴가를 떠나는 그녀들을 한 살인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길을 따라나선다. 그녀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를 피해 다니고, 이 남자로부터 그녀들을 지키겠다고 나선 윌리엄 번즈는 우여곡절 끝에 살인자가 되고, 결국 여섯 달 뒤 신원 불명의 사람들에게 살해당한다.
형사들
칠레 형사 두 명이 나누는 대화 형식의 단편. 선호하는 무기 이야기부터 시작해 그들 손을 거쳐 간 여러 범죄자들 이야기, 그리고 1973년 「그날」에 그들이 「이 나라의 진정한 남자들」을 죽인 이야기에 이어 열다섯에 멕시코로 건너갔다가 스무 살 때 칠레로 돌아온, 볼라뇨를 모델로 한 인물인 고등학교 동창 아르투로 벨라노를 만났던 이야기까지 주절주절 늘어놓는 두 형사의 잡담.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도 한 줌의 희망은 있다.」 「희망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지.」 「희망만이라도 소중히 지켜 내야지.」
제3부. 앤 무어의 삶
감방 친구
우리는 같은 해 같은 달에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서로 다른 감옥에 있었다. 1950년에 빌바오에서 태어난 소피아는 갈색 피부에 키가 작달막하고 매우 아름다운 여자였다. 1973년 11월에 내가 칠레에서 체포되었을 때, 소피아는 아라곤의 감옥에 수감된 상태였다. 당시에 소피아는 사라고사 대학에서 생물학인가 화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몇 명을 제하고 동기생 전부가 감옥에 가게 되었다. 이 두 잠자리 친구, 그리고 그녀의 또 다른 잠자리 친구인 공산당 친구, 전남편 에밀리오와 그의 애인 누리아를 둘러싼 이야기. 어느 날, 소피아는 작별 쪽지를 남긴 채 훌쩍 떠난다. 그리고 그녀가 새 애인과 함께 에밀리오를 죽이려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나는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소피아를 만나러 간다.
클라라
클라라는 풍만한 가슴에 다리가 가느다란 푸른 눈의 여자였다. 나는 미친 듯이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스페인 남부 도시로 돌아가자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당시 클라라는 열여덟이었고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에 학원에서 음악을 공부하며 은퇴한 풍경화가에게 그림을 배우는 중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미인 대회에 참가한다는 편지가 왔다. 나는 2등으로 입상한 클라라를 만나러 갔지만 결국 클라라는 시집을 간다. 그리고 1년인가 2년 후에 이혼을 하고, 다른 남자와 동거했다 바람을 피워 헤어지고, 그 사이사이 우울증에 시달린다. 그리고 이혼남 파코를 만나 재혼해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암에 걸린 클라라는 어느 날 돌연 사라진다.
조안나 실베스트리
서른일곱 살의 포르노 배우, 조안나 실베스트리가 지금 님므의 레트라페즈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 침대 맡을 지키는 어떤 칠레 형사의 이야기를 듣는 참이다. 이 남자는 누구를 찾는 것일까? 조안나 실베스트리는 1990년 즈음 자신이 인생의 정점을 달렸던 기억을 되짚어 본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를 촬영했던 기억. 그 기억 가운데 캘리포니아 최고의 포르노 스타였던, 그러나 지금은 병마와 싸우고 있는 잭 홈스가 있다. 이제 조안나는 병든 잭을 만나러 간다. 볼라뇨의 장편소설 『먼 별』의 한 부분을 확장한 작품.
앤 무어의 삶
앤 무어라는 한 여성, 그 일기와도 같은 이야기. 1948년 시카고에서 태어나고 3년 뒤 몬타나 주로 이사해 그곳에서 성장한 앤은 언니 수전의 남자 친구가 부모님을 살해한 사건과 얽힌, 평탄하면서도 기묘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열일곱 때 학업을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앤은 화가인 폴을 만나 동거하다 멕시코로 여행을 떠나고, 루벤이라는 한 남자와 친하게 지내게 되고, 결국 앤은 루벤과 함께 머문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찰스라는 흑인과 사귀고, 금세 헤어진다. 그리고 한국인 토니를 만난다. 토니와는 결혼까지 했지만 또다시 헤어지고, 토니는 자살한다. 그 소식을 들은 다음 날 아침 앤은 멕시코시티로 향한다. 너무 많은 남자를 만나고 너무 많은 직업을 전전했던 앤은 불현듯 스페인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앤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