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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작 : 첼로 협주곡 / R.쉬트라우스 : 돈 키호테 - 미샤 마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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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드보르작 : 첼로 협주곡 / R.쉬트라우스 : 돈 키호테 - 미샤 마이스키

Johann Strauss, Antonin Dvorak 작곡/Mischa Maisky 연주/Zubin Mehta 지휘/Berliner Philharmoniker 오케스트라 | Deutsche Grammophon / Deutsche Grammophon | 2004년 01월 06일 | 원서 : Dvorak : Cello Concerto / R. Strauss : Don Quixote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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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작 : 첼로 협주곡 / R.쉬트라우스 : 돈 키호테 - 미샤 마이스키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04년 01월 06일

관련분류

음반소개

디스크

CD 1
  • 01 Dvorak : Cello Concerto
  • 02 R.Strauss : Don Quixote

아티스트 소개 (5명)

작곡 : Johann Strauss (요한 슈트라우스)
작곡 : Antonin Dvorak (안토닌 드보르작)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한 체코의 작곡가로, 관현악과 실내악에서 모국의 보헤미안적인 민속 음악적 작품성 풍색과 선율을 표현하였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에 의하여 확립된 체코 민족주의 음악을 세계적으로 만든 음악가이다. 드보르작은 오스트리아 제국 프라하(현재는 체코 공화국) 근처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나서,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드보르작은 즈로니체에 있는 외삼촌과 리마 선생이 부친을 설득한 보람으로 ...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한 체코의 작곡가로, 관현악과 실내악에서 모국의 보헤미안적인 민속 음악적 작품성 풍색과 선율을 표현하였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에 의하여 확립된 체코 민족주의 음악을 세계적으로 만든 음악가이다.

드보르작은 오스트리아 제국 프라하(현재는 체코 공화국) 근처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나서,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드보르작은 즈로니체에 있는 외삼촌과 리마 선생이 부친을 설득한 보람으로 1857년 16세에 프라하의 오르간학교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음악가가 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프라하에서는 오르간 학교에서의 교육보다도 학우이며 훗날의 지휘자 칼레르 벤달과 친교를 맺고, 재학 중부터 오케스트라에 가담하여 바이올린을 켜서 수확을 올렸다. 특히 그 오케스트라가 당시 명성을 얻고 있던 바그너를 영입하고 있던 관계도 있어 드보르작은 퍽 오래도록 바그너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드보르작은 바그너식의 오페라나 음악극의 체코판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바그너의 멜로디나, 특히 화성의 특징을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여 받아들였다. 드보르작은 꽤 노력형이어서 학생시절부터 친척집에 기숙하면서 침식을 잊고 공부하였다.

졸업 후에는 프라하의 일류 호텔이나 레스토랑에 출연하고 있던 갈레루 코므자크 악단에 가담하여 비올라를 켜게 되었으나 1862년에 체코인을 위한 국민극장이 건설될 때까지의 임시극장이 개관되어 악단과 더불어 이 극장 전속 오케스트라의 핵심이 되어 약 10년간 근속하였다. 1866년부터 스메타나가 이 극장의 오페라 감독에 취임, 자작의 오페라 등을 지휘하게 되었으므로 바그너, 슈베르트나 베토벤의 영향과 함께 스메타나의 민족주의적인 음악사상이 그의 작품을 채색하게 되었다. 드보르작은 오케스트라 동료들로부터 작곡 같은 것을 해서 무엇하느냐고 핀잔을 받았으나 묵묵히 작곡을 하였으며 특히 1861년(20세 때)부터 실내악의 대곡(작품 1의 현악 5중주곡)을, 또 1865년부터 교향곡(제1과 제2를 이해에)을 작곡한 것은 당시의 슬라브계의 민족음악의 작곡가들이 스메타나를 비롯하여 대체로 이와 같은 순음악보다도 표제 음악이나 오페라에 끌려 있던 것과 대조적이어서 주목할 만하다. 드보르작의 이러한 순음악에 대한 열정은 죽기 약 9년 전인 1895년까지 계속된다. 후기 낭만적 음악의 화성조직이나 색채적인 오케스트라의 사용법이라든가 그러한 개개의 기법에 이끌렸어도 고전적인 음악형식을 저버리려고 하는 그 무렵의 작곡계의 일반적인 경향에는 반대였고 새로운 고전주의를 목표로 한 점에서 독일의 대작곡가 브람스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어 사실 브람스에게는 매우 총애를 받아 드보르작의 작품이 1877년 이후 베를린의 지므로크 음악출판사를 통해 출판되었고, 체코 이외의 나라에서 연주하게 된 것도 브람스의 소개로 된 것이었다.

브람스를 비롯하여 지휘자이며 피아니스트인 한스 폰 뷜로, 지휘자인 한스 리히터, 당시 빈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평론가 한슬리크 등 독일,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음악인 지위를 얻게 된 것도 드보르작의 명성과 작품을 세계적으로 만드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독일,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1884년 말 영국에도 9번 방문하여 영국을 위해 <유령의 신부> 및 <교향곡 제7번 D단조>를 쓰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음악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드보르작은 국제인으로서 사는 것을 바라지 않고 끝까지 체코인으로 살아갔다. 빈으로 이주하도록 재삼 권유된 것을 거절한 것도 그의 신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빈 정부에 대해 독립투쟁을 밀고 있던 동포들을 버리고 자신만 빈에서 안일하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1890년부터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과 그 밖의 것을 가르치고 있었으나, 1892년의 51세 때 뉴욕의 국민음악원의 원장으로 초빙되었다.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현악 4중주곡 <아메리카> 등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드보르작의 작품이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에 작곡되었다. 그러나 1894년의 여름 휴가로 귀국(이 때 피아노 독주곡, 8개의 <유모레스크>를 작곡했다. 그 중에서 7번째 곡이 바이올린으로 편곡되어 유명해지자 다시 미국으로 가기가 싫어졌지만 일단 돌아가서 결국 다음해 봄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오래도록 미국에 머물러 있을 것을 바라는데도 불구하고 계약을 중도파기하고 귀국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슬라브풍의 음악에 흑인과 인디언의 멜로디를 조화하며 작곡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귀국 후 만년의 약 10년간은 일반 민족주의 음악의 작곡가와 같이 오페라와 교향시에 주력하여 <루살카>(1901 초연)와 같은 귀여운 오페라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창작력이 그 정상에 달한 것은 이 이전, 특히 도미 직전인 수년간으로 추측된다. 피아노 3중주곡 <도무키>(1890-1891)가 그 좋은 한 예이듯이 종래의 독일류의 음악형식에 구속되지 않은, 슬라브인의 변화와 대조를 좋아하는 민족성에 한층 잘 맞는 새로운 형식적 질서를 낳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01년엔 빈의 종신 상원의원으로 귀족이 되었고, 같은 해 프라하 음악원의 원장이 되기도 한, 독립 전의 체코의 문화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받은 뒤 1904년 뇌일혈로 사망, 국장으로 모셔졌다.

드보르작은 이른바 귀재형의 음악가는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평범 속에 위대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이 있다.
연주 : Mischa Maisky (미샤 마이스키)
첼로 연주자 첼로 연주자
주빈 메타는 1936년 인도 봄베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메리 메타(Mehli Mehta)는 봄베이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미국 커티스 현악4중주단의 바이올린 주자와 아메리카 유스 심포니의 음악 감독으로도 활동하였다. 주빈 메타는 원래 의학을 전공하였으나 지휘자가 될 결심으로 의학공부를 중도 포기하고 빈 국립 음악 아카데미에서 지휘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1958년 영국의 리버풀에서 개최된 ... 주빈 메타는 1936년 인도 봄베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메리 메타(Mehli Mehta)는 봄베이 교향악단의 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미국 커티스 현악4중주단의 바이올린 주자와 아메리카 유스 심포니의 음악 감독으로도 활동하였다.

주빈 메타는 원래 의학을 전공하였으나 지휘자가 될 결심으로 의학공부를 중도 포기하고 빈 국립 음악 아카데미에서 지휘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1958년 영국의 리버풀에서 개최된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1961년∼1967년 캐나다 몬트리올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고, 1962년∼1978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주빈 메타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서 활동 당시 수많은 레코드와 연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69년 이스라엘 필하모니는 그를 음악고문으로 지명한 데 이어 1977년엔 음악감독, 1981년에는 상임감독으로 지명하였다. 또한 1978년에는 뉴욕 필하모니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가 되어 13년간 지휘하였으며 1998년 뮌헨에 있는 바이에른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주빈 메타는 오랫동안 전 세계에 음악을 통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왔으며 2011년 3월에는 미국 LA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되었다.
오케스트라 : Berliner Philharmoniker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BPO)
Antoni Dvorak 1841-1904 Richard Strauss 1864-1949 viola : abea Zimmermann (R.Strauss) cello : Mischa Maisky Berliner Philharmoniker conductor : Zubin Mehta * Live Recording Stereo DDD ⓟ 2003 DG

전문가 리뷰

악셀 브뤼게만
미샤 마이스키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이미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을 레너드 번스타인과 녹음한 적이 있다. "그는 예측이 불가능한 지휘자였습니다." 마이스키의 회고가 이어진다. "제가 예측불가능이라 하는 것은 좋은 의미로 하는 말이란 걸 미리 밝혀 둡니다. 텔아비브에서 번스타인과 저는 이 작품을 다섯 번 연주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 번 모두 서로 많이 달랐습니다. 한번은 마지막 악장 연주 중에 번스타인이 불현듯 리듬이 맥박과 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지휘봉을 들지 않은 손으로 다른 손목을 잡고 맥박을 잡으려 했는데 연주 중에 그게 가능했겠습니까? 결국 템포는 엉망이 되어 버렸죠." 주빈 메타는 "예측불가능" 번스타인과는 정반대라 할 정도로 미세한 부분의 차이에도 온 신경을 집중해 오케스트라를 '들볶는' 모습을 보여준다. "솔로이스트에게 이보다 더 좋은 지휘자는 없습니다." 마이스키의 말이다. 메타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 있어 마이스키와 연주한다는 것은 완벽주의자와 함께 작업한다는 것을 뜻한다: "미샤의 드보르작은 그만의 고유한 해석입니다. 악보에 바탕을 두지만 그의 연주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대단히 논리적인 방법으로 전개됩니다. 처음 그가 첼로 파트를 들려 주었을 때, 저는 소리를 드러내는 그의 능력과 함께 감각적이면서도 부자연스러운 점이 없는, 곡의 중심을 관통하는 투명하고도 유창한 연주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이러한 지적이 아니더라도 이 음반에 담긴 마이스키만의 해석은 많은 청취자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이 곡의 전통적인 연주와 커다란 차이를 지님으로써 가히 충격적일 만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드보르작 협주곡을 연주하는 방식에 수 많은 오류가 발견되었습니다," 첼리스트의 설명은 이어진다. "이미 초연 때부터 그러한 변형이 있었는데, 원작에 어울리지도 않는 첼로 카덴짜를 그냥 갖다 붙여버린 겁니다. 끔찍한 일이었죠. 드보르작도 똑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체코의 출판업자에게 보낸 작곡자의 편지를 읽어 보았는데 이런 행위에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잘 드러나 있더군요. 이럼에도 불구하고 이후로도 몇몇 '즉흥연주'들이 원작에 슬그머니 끼어 들어 왔습니다. 저는 드보르작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 협주곡의 원형을 복원하는 중입니다. 제가 저 자신에게 허락했던 것은 편지에서 드보르작이 반대했던 것과 같은 정신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누리는 자유였습니다. 하지만 악보에 표시된 템포와 음표만을 따라가는 이 연주가 오히려 놀랍게도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연주회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돌발 상황(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간에)"은 이 세상 그 어떤 스튜디오에서도 재현할 수 없는 것이다. 메타와 마이스키 모두 레코딩 아티스트로 커다란 성과를 거두어 왔는데 대부분의 주요 녹음은 스튜디오에서 했다. 이 앨범과 같은 라이브 레코딩은 이들 모두에게 모험과 같은 일이다. "라이브 레코딩은 좋아요," 메타의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이전처럼 스튜디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여기서 여덟 마디를 녹음하고, 저기 가서 여덟 마디를 녹음하고, 나중에 이 둘을 잘 이어 붙이는 식으로 작업할 수 없습니다. 콘서트 장에서 녹음할 때, 우리는 상상이 아닌 실제의 청중 앞에서 연주합니다. 이러한 녹음에는 현장의 긴장감이 그대로 담깁니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듯한 그 긴장감이 라이브 레코딩을 특별한 것으로 만듭니다." 마이스키는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몇 번 라이브 레코딩을 한 적이 있다: "저는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스튜디오에서는 연주회의 생생한 현장감을 절대로 연출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연주회를 여러 번 녹음한 후 흐름에 맞게 좋은 부분을 연결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스튜디오 녹음의 완성도로 공연장의 현장감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가장 완벽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이스키와 메타는 1972년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메타가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 마이스키는 이스라엘에 갓 도착한 러시아 망명객의 신분이었다. "끔찍했어요," 마이스키는 당시의 만남을 회고한다, "왜냐하면 주빈이 영어로 하는 말을 비서가 히브리어로 옮기면 제 여동생이 그걸 다시 러시아어로 제게 통역해줘야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런 불편도 저희가 나누었던 멋진 대화에 방해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러시아 당국은 마이스키의 여동생이 러시아를 탈출하자 그도 똑 같은 일을 저지를까 두려워하여 고르키 근처에 있던 강제 노동 수용소에 18개월 동안이나 가두었다: "그래서 저는 수용소에서 삽질도 하고 공산주의 선전 행사에 동원되기도 했죠. 결국 그게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는 걸 이제 우리 모두 알고 있기는 하지만요. 그 때 친구 하나가 저를 정신병원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그게 군대에 끌려가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었거든요." 메타는 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로스트로포비치가 당신을 도와줄 수 없었나? 어쨌거나 그는 당신의 스승이었잖아." "저는 1970년 여름에 구속되었습니다." 마이스키의 설명이다. "로스트로포비치는 그 때 솔제니친에게 거처를 제공한 사실이 발각되어 대중 앞에 나설 수도 없었고 여행도 금지 당했죠. 완전히 손이 묶인 상태였습니다." 마이스키는 감정의 기복 없이 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험들이 그의 음악의 일부로 자리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저의 스승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는 사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음악에 다가가야 한다고 늘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절대로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연주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 설명했던 적은 거의 없지만 제가 음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마이스키의 사적 경험, 그의 과거는 그의 연주의 일부를 이룬다. "저는 어떤 식이 되었던 간에 삶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음악인이 되기 위한 최고의 수련과정을 거쳤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저를 괴롭히는 사람, 저의 친구 - 그리고 저 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샤 마이스키와 주빈 메타는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을 이 곡이 작곡된 지 107년, 카라얀과 로스트로포비치가 베를린에서 연주한 지 34년,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된 지 13년이 흐른 시점에 녹음했다. 이 녹음은 음악이 매개하는 모든 것들, 역사적 상황들이 이렇게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한다.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 주빈 메타와 미샤 마이스키의 대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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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빈 메타와 미샤 마이스키가 베를린 필하모닉 홀 지휘자실에 앉아 있다. 베니어 판으로 마감한 벽이 그들을 둘러 싸고 있고, 녹색 카페트가 깔린 바닥 한 구석에는 청색 코너 소파와 유리로 만든 간이 테이블이 놓여 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연주에 대해 의논했던 1968년 9월의 실내 모습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광경이다. 카라얀과 로스트로포비치는 도이치 그라모폰이 의뢰한 이 곡 녹음을 달렘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서 하기로 했었다. 당시 베를린 필하모닉은 노란색으로 도장한 한스 샤로운 빌딩으로 이주한 지 막 5년이 되었다. 이 건물은 서베를린의 동쪽 구역 끝, 즉 동, 서독이 대치하고 있는 경계선상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장벽이 사라진 지금, 이 건물의 위치는 자연스럽게 통합 베를린의 중심이 되었다. 냉전의 한 가운데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예술감독과 바쿠에서 온 첼리스트 -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그리고 소련의 대표적 반체제 인사 솔제니친의 친구인 - 가 펼칠 조인트 콘서트는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정치적 의미를 내포할 수 밖에 없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다른 행적과 함께 이 음악회 사건은 추방의 훌륭한 구실이 되었다. 주빈 메타와 로스트로포비치의 제자인 마이스키에게도 드보르작이 미국 체류 시절 쓴 B단조 협주곡은 여전히 동, 서 문화의 대화로 기능한다. 바뀐 것은 정치적 상황 뿐이다.
미국에 온 보헤미안 - 프라하 극장의 전직 비올라 주자였던 안토닌 드보르작이 1892년 9월 뉴욕에 발을 디딘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1년 전, 그는 프라하 음악원 작곡과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이 여행을 위해 바로 휴가원을 내 버렸다. 유럽 출신 작곡가로서 그보다 더 미국인들의 기대와 존경을 모았던 이는 없었다. 9번 교향곡 "신세계에서" 초연 당시 청중들이 그에게 보낸 열화 같은 박수갈채와 성원은 박스 석에 앉은 드보르작을 마치 왕과 같은 모습으로 보이게 했다. 이 작품에서 프라하 출신의 낭만주의 작곡가는 고국 체코의 음악적 전통에 흑인의 리듬과 미국적 선율을 훌륭하게 결합해 냈다. 그의 첼로 협주곡은 대단히 생산적이었던 미국 체류 시절 막바지에 씌어졌다: 1895년에 완성된 이 작품의 초판은 그의 첼리스트 친구인 하누스 비한에게 헌정되었다. 이 작품에는 귀향을 앞둔 작곡가의 들뜬 기대가 드러나 있으며 전통적인 클래식 어법으로 회귀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전 작품의 뚜렷한 특징이었던 미국적 요소도 여기에서는 흔적만 남아있는 형국이다. 구조적으로 이 첼로 협주곡은 선율미를 우선으로 하는 교향시 형식을 지향한다. 대규모로 그리고 극적으로 강력한 알레그로로 시작해 꿈결 같은 선율의 아다지오로 이어져 보헤미아 민속 요소가 개입된 빠르고 강렬한 피날레로 마감되는 이 곡은 드보르작이 멀리 떨어진 고국에 부치는 안부 편지에 다름 아니다.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은 교향곡입니다, 교향곡," 주빈 메타가 리허설 휴식 시간에 설명한다. "작품의 다성적 구조를 보자면, 오케스트라와 솔로이스트는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요." 이러한 관찰의 결과를 바탕으로, 마이스키와 메타는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의 커플링 곡으로 슈트라우스의 돈 키호테를 선택했다. 슈트라우스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돈 키호테는 "기사 캐릭터 주제에 의한 환상적 변주곡"이다. 화려한 이 곡은 복잡하고도 다층적인 구조를 지녔다. 슈트라우스 음악의 특징 중 하나인 빼어난 음색 처리가 세밀한 부분에도 적용되었고 슈트라우스가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소형 교향곡과 같은 틀에 담겨 전개된다. 오케스트라가 그리는 상황 설정 속에 두 개의 주제가 드러난다. 하나는 첼로가 담당하는 돈 키호테이고 다른 하나는 비올라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주인공의 시종이자 친구인 산초 판자이다. 드보르작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이들 음악적 배역들은 오케스트라와의 협력 작업을 통해 작품의 10개 변주곡에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영웅(돈 키호테)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풍차를 창으로 공격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오케스트라가 표현하는 언덕과 바람과 하늘이라는 밑그림 위에서만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두 명의 솔로이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타베아 짐머만 - 모두 동등하게 독립적이어야 하는 이들과 함께 슈트라우스가 작품을 통해 요구하는 이와 같은 요소들을 결합하는 것은 메타에게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지휘자에게 있어 '그저' 반주만 하는 것 보다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 메타는 말한다. "다른 어떤 작품들 보다 특별히 이 두 작품에서 솔로이스트와 오케스트라는 악곡의 흐름에 민감해야 합니다. 악곡이 설정한 공간 속에서 이 둘은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함께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 말은 연주 중에 나타날 수 있는 돌발 상황 속에서도 각자가 서로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케스트라는 첼리스트를, 첼리스트는 오케스트라를 들어야 하죠. 이렇게 되어야만 우리는 함께 어우러져 더 이상의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철학적 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실이냐 하는 것은 우리가 연주하는 음악, 그 안에 자리합니다." 마이스키가 동등한 위치에서의 협력이라는 메타의 주장에 동의한다: "주빈은 반주자가 아닙니다 - 그는 연주자들과 함께 곡을 만들어 나가며 자신의 무게를 그 위에 얹습니다." 미샤의 얘기는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의 일화로 이어진다: "어떤 젊은 지휘자가 얘기했답니다: '마에스트로,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오케스트라는 그저 선생님 뒤를 따를 겁니다.' 루빈슈타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가 싶더니 곧 부드럽게 미소를 짓더랍니다. 지휘자는 더 이상 멍청한 소리를 할 수 없었고요. 훌륭한 솔로이스트는 오케스트라가 그저 뒤만 졸졸 따라오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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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포스터 안내
  •  구매하신 상품에 포스터 사은품이 있는 경우, 포스터는 상품 수량과 동일한 수량이 제공됩니다.
  •  포스터는 기본적으로 지관통에 포장되며, 2장 이상의 포스터도 1개의 지관통에 담겨 발송됩니다.
  •  포스터 수량이 많은 경우, 상황에 따라 지관통 추가 및 별도 박스에 포장되어 발송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반품/교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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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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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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