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은 연결에서 비롯되며,
인류학자는 그 연결을 찾아나선다
“인류학의 거대한 방향 전환을 이끈 책”
“독창적인 통찰력으로 인류학 자신을 구제한 책”
서구중심주의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은 현대 철학의 오래된 화두다. 그것을 극복하여 새로운 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 또한 꾸준히 이어져왔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대표적이다. 그는 서구의 전체론적 사고가 서구와 비서구를 가르는 위계 질서의 근본 원인이라고 일갈한 바 있다. 그들 사고의 중심에 있는 ‘로고스’(logos), 그 절대법칙이 서구와 남성을 중심으로, 비서구와 여성을 주변으로 배치했고 그 ‘중심’이 곧 ‘객관성’을 담보해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이분법은 자연과 문화에도 경계를 지어, 자연은 하나의 변하지 않는 실재로, 문화는 새롭게 형성된 것들로 각기 다르게 파악했다.
서구 전체성에 대한 이 같은 문제의식은 ‘종합’과 ‘합산’을 거부하는 학문의 흐름으로 이어졌고, 이는 1980년대 들어 ‘포스트모던’으로 통칭되었다. 하지만 전체성이 하나의 수사학일 뿐이라는 인식은 그 인식만으로는 제대로 된 대안이 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하나로 모아지길 거부하며 그렇게 많은 조각들로 쪼개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다시 어떤 하나의 전체로서 제시되는 순환고리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대안으로 다원주의가 제시되었다. 다원주의는 보편적 진리에 맞서 부분적 진리를 내세우며, 각자의 다양하고 무수히 많은 세계를 논한다. 이 다원주의는 서구적 시야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너머의 다수성을 지향했으며, 현대 인류학은 이로부터 ‘성찰적 전회’를 이끌어냈다. 1980년대 포스트모던의 광풍이 불던 때에 당대 인류학자들은 다원주의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기존의 특권적이고 독점적인 지위로서의 인류학을 내던지고 독자를 자신들의 연구에 끌어들이는 방식을 통해 하나의 장르로서의 인류학, 서사로서의 인류학을 제시한다.
『부분적인 연결들(Partial Connections)』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 책의 저자 메릴린 스트래선은 다원주의가 하나의 대안이긴 하지만 여전히 ‘전체’를 상정하기 때문에 결국 기존의 전체 대 부분의 틀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다원주의자들은 더 거대한 차원의 세계(전체)가 있고 그 하위에 작은 세계(부분)가 무수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체에 포괄된 부분들은 아무리 탈중심화하고 이질화하고 파편화한다 해도 끝내 전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에는 전체의 중심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反)로고스적 성찰 중 21세기 들어 가장 주목받는 관점은 ‘존재론적 전회’다. 이는 현대 인류학을 대표하는 학자인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등이 아마존 원주민 우주론 등의 비서구 철학을 기틀로 삼아 인류학을 서구 형이상학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제시한 실천이론이다. 21세기에 들어 인류학을 중심으로 천착하기 시작한 이 ‘존재론적 전회’는 이제는 인류학을 넘어 사회학, 비판이론, 유물론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가고 있다.
“지도는 존재하지 않고 만화경같이 한없이 뒤바뀌는 치환만이 있을 뿐이다.”
『식인의 형이상학』 저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가 “인류학의 거대한 방향 전환을 이끈 책”이라고 일컬으며 ‘존재론적 전회’의 대표 도서로 꼽은 책이 바로 이 『부분적인 연결들』이다. 메릴린 스트래선은 이 책을 1987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해서 1991년에 출간했다. 출간 후에 뚜렷한 반응을 얻지 못했던 이 책은 21세기에 들어서 위와 같은 ‘존재론적 전회’의 부흥 속에서 사람들에게 재평가 받기 시작했고, 2004년에는 신판으로 재간행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기승전결식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제목 그대로 부분부분 쪼개져 편성되어 있다. 크게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한 부분은 포스터모던 인류학의 대표적 개념인 ‘문화를 쓴다(Writing Cuture)’를 겨냥한 ‘인류학을 쓴다(Writing Anthropology)’이고 다른 한 부분은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인류학의 방법론으로서 자신의 퍼스펙티브를 제시한 ‘부분적인 연결들’이다. (‘칸토어의 먼지’에서 따온 이 책의 구성기법은 책의 25쪽에 일목요연하게 제시되어 있다.)
메릴린 스트래선이 『부분적인 연결들』을 펴냈던 1980년대 후반의 영미 인류학계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리멸렬함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포스트모던 인류학은 기존 인류학의 ‘민족지적 권위’를 무너뜨리고 독자를 민족지 연구에 편입시킴으로써 ‘텍스트-작가-독자’ 간의 상호작용에 새로운 권위를 부여했다. 이제는 현장연구로부터의 ‘재현’이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그 현장감을 체감케 하는 하나의 ‘텍스트’ ‘장르’로서의 인류학을 주창했다. 이른바 ‘문화를 쓴다’라는 개념이 이때 등장했다. 스트래선은 이 같은 당대 인류학의 문제의식에 기본적으로 동감한다. 다만 그는 민족지를 텍스트라는 장르적 차원에 내맡기는 것으로는 당면한 인류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부분적인 진리’가 내포한 다원주의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그에 안주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포스트다원주의를 주창하게 된다. 이 같은 고민은 자연스럽게 서구/비서구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으로 되돌아간다. 이 이분법은 우리에게 전체가 개별적인 부분들로 이뤄져 있으며 중심을 이루는 인간들이 중심화의 파편으로서의 개인을 다원적으로 통합하고 있다고 전제한다. 우리가 아무리 이 난제를 피하려 해도, 원자론적 관점(전체는 독립된 하나하나의 종합이다)과 총체론적 관점(요소는 전체의 구조나 체계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의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이다.
『부분적인 연결들』에서 말하는 ‘부분’이 전체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우리가 ‘부분’을 생각하면 곧바로 ‘전체’를 떠올리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기존의 서구 철학은 ‘메레오그래피(mereography)’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스트래선은 이를 대신해서 ‘메로그래피(merography)’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안한다. 메로그래피란 생물학 용어인 부분할(部分割, meroblast)에서 나온 개념으로, ‘mero’는 그리스어로 ‘부분’을 의미하고 ‘graphic’은 한 관념이 다른 관념을 기술하는 방식을 뜻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기술하는 행위는 기술되는 어떤 것을 전체의 일부가 아닌 별개의 부분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메로그래피는 전체로 회수되지 않는 부분 그 자체를 이야기한다. 스트래선은 남태평양의 섬 지역인 멜라네시아를 찾아 현장연구를 하던 중에 이 같은 기술방식의 필요를 절감한다. 비서구 지역에 간 인류학자 대다수는, 그곳의 개별 사례들을 면밀하게 조사해서 종합적인 배치를 산출하려 한다. 문제는 중심부에 고정적으로 배치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혼란스런 상황을 인류학자들이 맞닥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지도는 존재하지 않고 만화경같이 한없이 뒤바뀌는 치환만이 있을 뿐이다.”(책 36쪽)
전통적으로 서구의 인류학은 비서구의 비교적 작은 인구집단에 대한 총체적인 기술을 시도해왔다. 스트래선은 현장에 들어가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을 문화나 사회를 표현하는 데 활용한다는, 인류학자의 전형적인 인물상이 이제 효력을 잃었다고 지적한다. “거기에 있었다는 것에서 오는 권위는 정당한 권위가 아니라 오히려 저자성(authorship)에 대한 매점매석임이 판명되었다”(77쪽)는 것이다.
비서구 지역의 현장연구를 통해 이론적 성취를 이뤄낸 당대 서구의 인류학자들은 그들 자신의 문화인 서구에 대해서는 총체적인 기술을 시도할 수 없었다. 기존의 연구 방식으로 자신들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기술하자니 고려해야 할 너무나도 많은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류학자는 자기 문화를 들여다보면서, 타문화의 연구대상과는 다른 잣대를 찾게 되었다. 스트래선은 바로 이 같은 지점이 서구의 인류학자와 비서구의 연구대상 간의 관계를 다시금 성찰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인류학자가 자문화를 총체적으로 기술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그와 동시에 타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기술’이라고 정의해온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스트래선의 메로그래피가 해법을 줄 수 있다. 스트래선은 이제 머릿속에 있는 ‘전체’의 상을 버리고 각 부분들 간의 관계에 집중하자고 주장한다. 이로써 우리는 분단(分斷)에 의한 관계, 즉 명백히 연결되어 있는 자료를, 하나의 전체를 절단해서 얻는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절단은 새로운 전복적 사고로 우리를 이끈다.
부분과 절편으로 넘쳐나는 세계, 불안의 공간에 던지는 메시지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세계에 절망한 사람들은 그 조각난 것들을 다시 모아내려 한다. 그렇게 애쓰는 모습들에서는 어떤 ‘서구적인 불안’이 감지된다. 아마도 이 불안은 부분과 절단이 파괴적인 행위이며 그로 인해 어떤 사회적인 전체가 반드시 다수화되고 파편화되고 말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즉 “신체가 수족을 잃어가는 느낌”(267쪽)을 받는 것이다. 이에 대해 스트래선은 본인이 관찰한 멜라네시아의 일부 사례들을 제시하며 사고의 전환을 촉구한다.
스트래선이 택한 사례들은 얼핏 보기에는 여타 인류학의 현장연구와 다를 바가 없다. 멜라네시아의 나무와 피리는 서구 사람들의 눈으로는 본래부터 인간과 분리된 사물이다. 다시 말해, 나무와 피리는 본래부터 개개 인격의 신체와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멜라네시아 사람들은 스스로가 나무와 피리에 직접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스트래선은 멜라네시아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나무든 피리든 그 어떤 물질의 안을 보든 밖을 보든 상관없이, 그것이 인격에 속함과 동시에 인격을 넘어선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다시 말해 그 조형물들은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관계들에 없어서는 안 될 확장물이다. 또한 물질로서의 한 인간의 신체는 그것이 수많은 외부의 것들과 맺는 관계들로 구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무와 피리, 카누와 말뚝 같은 조형물들에 의해서도 확장되고 재편된다.
스트래선은 이처럼 오히려 절단이 관계를 만들어내고 응답을 이끌어내는 장면을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다시 말해 절단이 하나의 창조적인 행위로 여겨지는 곳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존재하며, 그곳에서 절단은 인간의 내적인 역량과 그가 맺는 관계의 외적인 힘을 선보인다는 것이다. 절단이 창조적인 행위라는 사실은 좀 더 커다란 사실로 우리를 인도한다. 즉, 정보의 파열은 곧 하나의 확장이기도 하다. 이로써 멜라네시아 사람들은 자신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누이의 아들들과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으며, 또한 이 같은 정보의 파열은 “개인의 정체성이 위치한 장소들을 차이화”(276쪽)함으로써 한 인격을 다른 인격의 확장된 부분으로 드러낸다. 즉 절단과 확장은 똑같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인간과 유기체 괴물의 혼합으로 신체를 확장한다’라는 주장으로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론을 떠올릴 수 있다. 스트래선은 이 책에서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론을 빌려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는 사이보그, 즉 수많은 잡종들이 있음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타인과 관계를 맺거나 다른 이를 자신의 세계 속에 불러들여와 참여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가 관계를 맺는다고 할 때에는, 자신의 경험에 하나의 관계를 덧붙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지배와 권력, 사회관계 등등이 서로 작용하면서 만들어내는 사회적 대상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될 뿐이다.
스트래선의 이론은 서구의 수많은 학술담론의 설명-탐구의 틀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다만 그는 “현재의 정식화가 순간적 개념화에 불과하고 현재의 대처가 부분적인 연구일 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스트래선에게 인류학적 글쓰기란 “복잡성에서 무한한 복잡성을 만들어내는 필수적이고 활력적인 방식”(277쪽)이다. 우리는 채울수록 점점 더 많은 공백을 만들고 있다.
“나는 형식을 지지하지, 과정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번 한국어판 번역은 원서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메릴린 스트래선과의 대담을 함께 수록해 그의 이론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높이고자 했다. 대담은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로, 아마존의 샤머니즘을 연구한 인류학자 카를로스 파우스토와 함께 진행되었다. 1998년 가을 브라질 국립박물관에서 치러진 이 대담에서 스트래선은 미학적 감각으로서의 ‘형식’을 제시한다. 그에게 형식이란 “사물의 출현이며 가시화된 성질과 속성”(313쪽)이다. 그 ‘형식’은 그가 연구한 멜라네시아 사람들이 이론 이전에 선험적으로 체득한 것이다. 다시 말해 멜라네시아 사람들에게는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 곧 더 이상 논의할 계제가 없는 단 하나의 삶의 증거다. 그들에게 어떤 물건은 그들 자신이 방금 한 행동의 증거로만 이야기된다. 이 같은 스트래선의 형식론은, 형식은 곧 생각을 담는 틀이라는 기존의 판에 박힌 전제를 깨뜨린다.
스트래선의 형식에 관한 이야기는, 지식이 세계를 어떻게 ‘전체’로 구상하는가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어딘가’에서 온 세계들과 어떻게 관계할 것이며 그 속에서 무엇이 생성되는지에 주목한다. 현대 사회의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그 정보 각각의 디테일이 아니라 그것들을 연결해주는 ‘관계’다. “계몽주의와 과학 혁명 궤도 바깥의 사회들에서는 관계가 사물의 반대편을 능수능란하게 해명한다. 인류학자는 세계를 설명하는 다른 방식을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해낼 것이다. 요컨대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서구의 전체론이 문명적 인간의 사고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문명이 생긴 이래로 인류가 비대칭적 관계, 즉 힘의 불균등한 관계를 용인하면서 힘 있는 자의 시야를 세계에 대한 앎과 등치해왔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인류가 자신의 통념을 버리려 하기에, 비대칭적 관계와 시선을 허용하지 않기에 지금 우리는 새로운 관계와 앎을 모색해야 한다. 『부분적인 연결들』은 그 관계를 찾아내는 데에서 하나의 열쇠와도 같은 책이다.